학생들에게 뭔가 연습을 시켜 놓고, 과제를 주고 나서 한숨 돌릴라 치면 소곤소곤 학생들의 말소리가 들린다. 우리 학교는 모둠 형식으로 4명씩 함께 앉는데, 연습하면서 과제하면서 자기들끼리 한국말로 여러 가지 말을 한다. 수업에 대한 이야기일 때도 사담일 때도 있다. 나는 학생들 간의 적절한 사담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물론 한국말로). 그래서 과제 수행이 끝나면 주말 이야기 여행 이야기 서울 이야기 뭐든 나누라고 부추긴다.
한국어를 처음 배우는 외국 학생들은 저 세상 귀여움을 갖는다. 실제로 미숙한 한국어로 사담을 나누는 학생들이 교실 밖에서 자기 나라 말로 말하는 걸 들으면 나는 깜짝 놀란다. 아, 다들 어른이었지. 모국어 패치가 적용되면 급격히 어른이 되고, 한국어 패치가 적용되면 아가가 된다.
# 에세이, 반말로 써도 돼요?
쓰기 시간에 일어난 일이다. 이번 주제는 어려우니까 분량을 평소의 반만 써도 된다고 알려줬다. 실제 에세이 종이를 보여주면서 여기에서 반만, 50%만 써도 된다고 말한 후 돌아서니 어김없이 속닥거리는 무리들이 있다.
A : 반말?? 반말로 써도 돼요? 진짜??
B : 아니~~~~~~ (웃느라고 이 친구, 말을 못 한다)
(눈물을 흘리며) 그래도 끝까지 설명해 준다.
"선생님이 끝까지 안 써도 된다고 했어요. 반만 써도 돼요"라고. 착하고 친절한 학생들이다.
# 덕분에 마음이 더워요.
학기 중에 가끔 잠깐의 방학이 있다. 우리 학교는 한 여름과 한 겨울에 학기 중에 일주일 정도 쉰다. 방학 들어가기 전 학생들은 방학 잘 보내라고 애틋한 인사를 나눈다. 누가 보면 영영 헤어질 사람들처럼 인사를 하고 또 한다.
A : 방학 잘 보내세요, 한스 씨. 보고 싶을 거예요. (일주일 방학 들어가면서 무슨 이렇게 까지)
B : 고마워요. 카밀라 씨 덕분에 마음이 더워요.
"덕분에 마음이 더워요"라니. 꿈보다 해몽인지 모르겠지만, 이 말은 아마도 '마음이 따뜻해졌다'쯤으로 해석 가능할 것이다. 선생님인 나는 이렇게 단어의 뜻에만 집착한다. 하지만 이심전심이라고, 둘은 말이 잘 통한다.
# 양이요? 그, 동물, 양이요?
그날 우리는 '양이 적다, 양이 많다'라는 표현을 배웠다. 혼자 먹기에 양이 좀 많아서요. 저는 양이 적은 편이에요. 그런 표현들. 짝활동 중 학생 한 명이 조심스럽게 친구에게 묻는다.
A : 미나 씨, 혹시, 저기에 있는 '양'이 그.. 동물 '양'이에요?
B : 네?
A : 그거 있잖아요. (자기의 설명이 부족하다 생각했는지 공책에 양을 막 그린다.)
B : 네???????
엿듣던 내가 가서, 이 상황을 수습해 줬다.
# 파파고, 구글
한정식 집에 가면 밥하고 국이 나와요. 그리고 여러 가지 반찬이 나오는데..... 이쯤 읽었는데 또 한 책상에서 웅성웅성 소곤소곤 뭔가 이야기하느라 정신이 없다.
A : 파파고, 구글?
B : 아니요. 밥하고 국을
A : 아... 저는 파파고, 구글. 이라고 생각했어요. 하하하하하하하
이 친구들은 목소리가 워낙 큰 편이어서, 이 시점에서 나뿐만 아니라 학생들 모두가 듣고 웃을 수밖에 없었다.
# 지역이요? 지옥이요?
난 분명 <지역>이라는 단어를 가르쳤다. "이 지역은...." 어쩌고 저쩌고 열심히 말했는데, 어디선가 속닥속닥 신나는 대화가 이어진다. 그냥 두자니 시끄럽고, 잔소리를 하자니 너무 신나 있다.
A : 솔로지옥 봤어요?
B : 아~ 그럼요! 그 사람 중에.......
아무리 말하기 연습 시간이라고는 하지만, 난데없이 수업 시간에 예능 이야기라니. 이런 이야기는 내 레이더에 정확히 잡히고, 나는 가서 끊어 준다.
"갑자기 왜 이런 이야기를 해요?"
"정말 죄송해요, 선생님. '지역'을 배우니까 '지옥'이라는 단어가 생각났어요. 시즌1이 더 재미있긴 한데... 그런데 혹시 선생님도 봤어요? 네? 안 봐요? 왜 안 보세요? 정말 재미있어요. 꼭 보세요!"
정신 똑바로 차리지 않으면, 그들 말에 내가 말려 들어간다.
언어란, 정말 신기하다.
한국어 교실은, 정말 다채롭다. 서로 모국어가 다르고 우리는 모두 다르다는 것을 전제하고 만나는 이곳. 이렇게 다양성이 편견 없이 수용될 수 있는 곳이 어디에 있을까. 달라도 되는 곳.이곳에서만큼은 우리 모두 나 혼자 다른 시선이어도, 다른 모습이어도, 대부분 이해받는다. 그리고 '세상은 다양한 사람들 투성이다'는 생각을 머리와 마음에 장착하고 시작하기 때문에, 나 또한 대부분 이해한다. 그렇다면, 이곳보다 더 안전한 곳은 세상 어디에도 없다. 무엇이어도 어떤 모습이어도 여기서는 괜찮다. 그래서, 이곳이 참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