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기업에 들어갔을 때, '잡디'의 존재를 알게 됐다. '잡디'만 있으면 어느 날 내가 갑자기 회사에 안 나와도 누군가 다른 사람이 날 대체할 수 있으며, 내가 책상에 앉아 뭘 하는지 윗분들이 정확히 알 수 있다고 했다. 또한 '잡디'를 허술하게 쓰면 내가 얼마나 잡다한 일들로 바쁜지 아무도 모르기 때문에 '뭐 이것까지 문서화 하나'싶게 자세히 쓰라고 했다. 잡 디스크립션(Job description), 한국어로 하면 직무기술서. 나의 일을 목록화하고 문서화하는 것, 그것이 업무의 시작이었다.
잡디를 열심히 기술한 후 두 번째 문서를 받았는데, 그건 '직무능력표'였다. 사실 잡디만큼 중요한 게 직무능력이 아닐까 생각했는데, 거기에는 그 직무를 완수하기에 필요한 나의 성격과 기질이 문서화 돼 있었기 때문이다. 이건 100% 정성적인 자기 기입식 평가로, 이를 테면 이런 것이었다. 적극성, 꼼꼼함. 그때 직무능력표에서 확인한 단어들은 외국에서 사용되는 것을 그대로 가져와 번역했는지 아니면 본래 그런 식으로 평가하는 것인지, 서술식 문항도 꽤 됐다. 그건 또 이런 식이었다. '어떤 새로운 과제가 주어졌을 때 적극적으로 기획하는 능력'. 지금 생각해 보니 이건 지금의 MBTI와 많이 유사하다. 아무튼 그때 내 머릿속에 깊이 박힌 회사원의 능력에는 '애매모호함을 견디는 능력'이라는 게 있었다. 이 또한 서술식이었고 약간 번역체였던 걸로 기억하는데, 업무 중에 발생하는 애매모호함을 견디는 능력. 그때 나는 이 문장을 읽으며 감탄했다. 회사에 다녀보니 정말 하루하루가 애매모호함의 연속이었기 때문이다. 어느 것 하나 확실하지 않고 결정된 바 없고 명확히 보이지 않는 미래들. 우리는 항상 삼삼오오 모이면 "어쩌자는 거야? 도대체 뭘 하라는 거야? 나중에 어쩌려고?" 그런 말들을 입에 붙이고 살았다. 나중에 깨달은 것은, 우리는 모두 서로 몰랐던 것뿐이다. 직급이 높은 사람도, 직급이 낮은 사람도, 예측하지 못하기는 매한가지. 그저 개인이 아니라 함께 하는 거니까 가능했던 것 같다. 개인이 용기 있거나 무모해지기는 힘들어도, 다 함께 무모해지거나 외면하기는 쉬우니까.
그런데.
또 반대로 반대의 면을 나는 알아갔다. 매우 애매모호하지만 서로를 믿고 하루씩 나아가다 보면, 시간과 함께 완성되는 일들도 있었다. 거창한 신뢰가 아니더라도 괜찮았던 것이, 모든 일은 시스템이 하는 것이고 거기에 시간의 힘이 보태진다면 각종 우려를 잠시 접어두어도 될만한 가치가 있었다. 나는 직급이 올라가면서 그걸 알았고, 직급이 올라가며 제발 조직원들이 너무 많은 우려는 하지 말아 주길 기대했다.
그리고 더 시간이 흘러 나는 우유성에대해 생각했다. 애매모호함은 다른 말로 하면 우유적 속성이 아닌가. 애매모호한 상황이므로 어떤 일도 일어날 수 있고 그렇다면 뜻밖의 행운을 기대해 봐도 되지 않을까. 아무 일도 일어날 것 같지 않은 매일이 아니라, 무슨 일이든 우연히 일어날 수 있는 하루하루.
사회생활을 함께 시작한 친구와 동료들에게서 하나둘 엔딩이 보인다. 직장 생활을 여전히 하고 있기도, 의외의 사업을 하고 있기도, 승승장구하고 있기도, 전혀 예측 못한 일을 하고 있기도. 20대에 같은 곳에서 만났는데 40대의 우리는 정말 다종다양한 모습이다.
그래서 씁쓸하기도, 부럽기도, 놀랍기도, 자랑스럽기도.
그러니까 좀 더 살아볼 일이다. 삶의 우유적 속성을 믿으며, 내 앞에 뜻밖의 날들이 펼쳐질지도 모르니까, 하루하루 감사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