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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gnes Mar 20. 2023

온 우주가 내 직장생활을 응원했다

임신을 한 후 생각했다. 내가 언제까지 일을 할까. 

임신과 출산으로 인해 내 직장생활이 중단된다고 해도 나는 크게 난감한 마음이 들지 않았고, 오히려 나에게 핑계가 되어주어도 좋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치밀하게 뭔가 계산하지 않고 그냥 시간을 보냈다. 일단 대중교통이 정말 싫고, 대중교통을 타고 다니며 임산부의 시절을 겪고 싶지 않았던 나는, 임신과 동시에 회사 앞으로 이사를 했다. 조산의 위기를 겪었기 때문에 열 달 꽉 채워 다니지도 않았지만, 그래서 대부분의 출퇴근은 택시로 했다. 출산 휴가도 최대한 빨리 당겨 썼다. 꼭 회사에 돌아가지 않을 것처럼. 이렇게 출산 휴가를 빨리 들어가면 아이를 낳은 후 복직해야 할 날도 빠르다고 했지만 개의치 않고 최대한 서둘러 출산 휴가에 들어갔다. 그 결과 2개월이 조금 넘은 아이를 남겨 두고 복직하게 되었지만, 그렇게 모든 계획에 치밀하지 못했고 그래서 빠듯하게 일상이 흘러갔다.


두 달 남짓한 시간을 모유 수유하겠다고 고군분투하고 있던 어느 날 친정 부모님이 말씀하셨다. 아기를 봐 줄 테니 같은 아파트로 이사 오라고. 그래서 부모님 집 옆 동으로 이사해 같은 아파트에 산 시절이 지금까지 이어졌다. 살던 집이 빠질 때까지는 주중에 한 번, 그리고 주말에만 아이를 봤다. 모든 게 어설펐고 가끔은 아기가 날 못 알아봤다. 옆 동으로 이사 온 후 아기가 날 몰라보는 일은 없었지만 집에 와서도 할머니를 종종 찾았다. 울음을 그치지 않아 친정 엄마에게 다시 가 재운 날도 여러 번이었다. 한 번은 정장 차림으로 아이를 업고 집에 가는 길이었다. 퇴근이 항상 늦었기 때문에 8시에서 9시 사이, 캄캄할 때였다. 50m도 안 되는 거리를 업고 집에 가는데, 아기가 계속 내려갔다. 아기를 제대로 업고 걸어본 적이 없어서, 핸드백 속 물건들은 쏟아질 것 같았고 아기는 흘러내려 바닥에 닿을 것 같았다. 그때가 가끔 생각이 난다. 내 인생이 아니라 다른 사람 인생에 잠깐 들어가 역할 놀이를 하는 기분이었다.


아기가 두 살 때쯤 몸도 마음도 너무 피곤해서, 하루는 엄마에게 안 되겠다고 말했다. 이렇게는 더 이상 회사 못 다니겠다고. 그때 엄마가 말했다. "아이 금방 큰다." 그런 이유로 그만두지 말라는 말이었다. 엄마는 회사에서 나가라고 한다거나, 정말 몸에 병이 나거나, 그런 극단적인 경우가 아니라 그냥 힘든 거라면, 회사 생활은 버틸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셨다.

그리고 어물쩡하는 사이, 그냥저냥 살다 보니, 정말 아이는 금세 컸다.


아기가 네 살 때쯤엔가, 그때도 너무 힘들었다. 팀장님에게 이야기했다. 불쑥 그냥 툭, "그만 다닐래요." 팀장님이 한 달간의 휴가를 주셨다. 담당하고 있는 업무의 스케줄을 미뤄 둘 테니 한 달간 푹 쉬고 오라고 했다. 일단 한 달 쉬고 나니 회사가 조금 그리워져 다시 회사로 돌아갔다. 그래서 나는 또 퇴사하지 못했다.


내 퇴사의 꿈은, 아이가 만 다섯 살 되던 해 이루어졌다. 1년의 육아휴직을 쓰려면 아이가 만 5세를 넘기면 안 됐다. 그때 막차를 타듯 육아휴직을 신청했고, 덕분에 난 내 아이 6세 때 처음으로 아이를 어린이집에 등원시켜 봤다. 기적적으로. 1년의 육아휴직 동안 내 몸이 얼마나 망가졌는지 확인하러 여기저기 병원에 다녔고, 퇴사 절차를 밟았고, 퇴사 이후 뭘 할지 찾고 결정했다.


아이를 키우면서 항상, 상황이 여의치 않으면 회사를 그만두고 싶었다. 우리는 정말 경제적으로 부족했기 때문에, 내가 아무리 열심히 번들 크게 나이질 수 없었고 마찬가지로 내가 아무리 적게 번들 크게 빈곤해질 위험도 없었다. 그래서 가볍게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내가 지금 경기도 어느 끝자락에 작은 아파트라도 사서 마음 편히 살 수 있는 것은, 그때 내 직장생활을 온 우주가 응원했기 때문이다.


어느 날 백화점 식당가를 지나가던 내 엄마가, 삼삼오오 모여서 유모차와 함께 브런치를 즐기는 아기 엄마들을 보면서 '내 딸은 저런 시간이 어떤 맛인지 평생 모르겠구나.' 쓸쓸히 내뱉은 적도 있으나, 그 말을 나에게 옮긴 건 아이가 다 큰 후였다.


그리고 또 시간이 흘러 나는 다시 직업을 찾았고, 집을 나선 후 15시간이 지나야 다시 집으로 돌아오는 예전의 그런 직업이 아니기에 아이의 초등학교 시절을 충분히 함께 할 수 있었다.


어쨌든 나는 여전히 친정 부모님의 응원으로 아이를 키우고 있다. 어쩌면 내 우주는 가족이 전부인 것 같기도 하다. 그때나 지금이나, 그리고 앞으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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