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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gnes Apr 04. 2023

아무래도 좋을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

남편과 나

사정이 되는 어느 주말이면 남편과 주말 농장에 간다. (부모님께는 죄송하고 아이에게는 미안하지만) 챙겨드려야 하는 부모님도 안 계시고 챙겨 키워야 하는 아이도 없는 곳에서 남편과 둘만의 시간을 가지면, 고작 하룻밤인데도 푹 쉬다 온 기분이다. 그저 둘이 뚝딱 라면을 끓여 먹어도 되고, 소량의 재료만으로 고기 조금에 야채 조금이면 되고, 가볍게 차려 가볍게 먹으면 되고, 각자의 시간을 하릴없이 보내도 되니까. 누가 뭘 좋아할까 누가 뭘 안 먹을까 고민 안 해도 되고, 즐겁지만 힘겹게 무리하지 않아도 되고, 그렇다.

또 조용한 지옥과 시끄러운 천국의 문제다. 어디에나 있는.


남편과 그런 사이가 됐다.

어떤 사이냐면, 아무래도 좋을 말을 아무렇게나 나누고도 어색하지 않은 사이. 이번엔 그런 말을 했다. 우리 아이 대학 가면, 군대 가면, 여기 이 시골에 내려와 집 짓고 하고 싶은 거 맘껏 하면서 살자. 동네 책방을 오픈해도 되고 작은 글쓰기 공부방을 차려도 되고, 나라면 잘하겠지 묻고, 그럼 너라면 가뿐할 거야 응원하듯 대답하고. 그치? 내려와서 책방도 하고 책 읽기 클래스도 하나나 둘쯤 운영하고, 집 지으면 거기 1층에서 해도 되고. 잘 될 거야, 막 대박 나는 거 아냐? 힙해지는 거 아냐?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막 해 댄다.


아무 데서도, 누구 한테도, 꿈에서도, 혼자서도 하지 않는 허세 가득한 말을 주거니 받거니 하고. 어차피 그냥 내뱉어 보는 소리인 걸 나도 알고 그도 알고. 그래도, 말해 본 것만으로 마음이 말랑말랑 해지는 말들.


다음 날 일어나면, 잠에서 깨면, 우리는 일터에 가야 하고 이제부터 시작될 중학생 아이의 길고 긴 입시를 치러야 하고 늙어가는 부모님께 청춘이 되어 드려야 하고. 하지만 가끔 이렇게 서로 주거니 받거니 아무 말이나 내뱉을 사이가 있다는 것이. 그런 존재가 있고 내가 그런 존재가 되었다는 것이, 참 신기하고 마음 놓인다.


큰 사고를 겪은 후 남편의 카카오톡 프로필 이름을 전우로 바꿨다. 결혼 15주년을 맞이한 해에는 남자사람친구로. 가끔 알다가도 모르겠는 남자 동물로 여겨질 때는 아는 남자로. 왠지 봄날을 보내며 남편이 퍽 마땅하고 친근하게 느껴지는 시절에는 친한 남자로.


드디어 우리는, 실없는 농담도 마땅히 필요한 서사가 되는 그런 사이가 됐다. 앞으로 우린, 또 어떤 사이로 변화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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