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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gnes Apr 17. 2023

책이라는 나의 세계

이번 봄 방학은 아주 긴 편이다. 꽉 채워 2주를 쉴 수 있을 것 같다. 처음 이 직업을 가졌을 때는 꼬박꼬박 방학마다 여행을 갔다(1년이 10주씩 4개의 학기로 운영되는 어학당은, 학기와 학기 간 짧으면 1주일 길면 2주일 정도 방학이다). 하지만 이제, 그러지 않는다. 그냥 진짜, 집에서 쉰다.


나 : 이번 방학 때는 일본어 공부를 좀 해 볼까 봐. 개인 강습을 2주간 타이트하게 받아 볼까?
남편 : 하지 마.
나 : 왜? 아니면 예전에 했던 전화 영어나 화상 영어를 알아볼까? 2주 동안 매일 2시간씩 하면......
남편 : 하지 마. 그냥 쉬어. 너 열심히 안 하잖아.


맞다. 난 외국어 공부를 하고 싶어 하면서도 열심히는 안 한다. 남편은 아이와 둘이 계속 이야기를 이어 간다. 엄마는 말이야, 읽고 쓰는 거 말고 다른 건 별로 열심히 안 해. 소중한 것을 먼저 하는 건데, 엄마한테는 소중한 게 읽는 거거든. 그리고 그다음이 쓰는 거.


맞다. 나는 항상 다른 하고 싶은 많은 것들의 계획을 세우지만, 별로 열정적이지 않다. 항상 읽는 일이 우선순위의 최상단에 있다. 직장만큼은 꾸준히 다니는데, 이건 참 신기하다. 역시 일은 일인가 보다.




한동안 소설을 읽고 나면, 에세이가 읽고 싶다. 한동안 에세이를 읽고 나면, 청소년 소설이 읽고 싶다. 한동안 비건에 대한 책들을 읽는가 하면, 고전으로 눈을 돌릴 때도 있다. 책의 세계는 정말, 무궁무진하다. 얼마 전 우연히 시집을 한 권 사게 됐다. 소도시에서 우연히 들른 책방이었는데, 너무 고요하고 적적해 책을 세 권이나 살 수밖에 없었다. 조용히 없어질까 봐 걱정이 돼서, 몇 권 사야지 마음먹고, 오랫동안 책을 훑어봤다. 그중 한 권이 박준 시인의 시집이었다. 제목을 많이 봐서 이미 읽은 것 같은 그 시집 <당신의 이름을 지어다가 며칠은 먹었다> 마지막 페이지를 들춰 보니, 내가 산 책이 68쇄다. 68쇄나 찍은 시집이라니. 어마어마한 시집이다. 그리고 생각한다. 언젠가 시를 탐닉할 때도 오겠구나. 이렇게 내가 모르는 미지의 장르가 많구나. 두근두근. 내 노년은 절대 심심하지 않을 거다.


책을 돕는 책굿즈는 무궁무진하다. 지난번에 산 책소파는 정말 유용하다. 삼각형 모양이고 손잡이도 있고, 책장이 넘어가지 않게 고정하는 고무줄도 있다. 남편에게 부탁해 무려 해외직구한 물건인데, 나는 이걸 장거리 여행 갈 때도 챙기고 매일밤 침실로도 가져간다. 이북도 안정적으로 올려지고 안락의자 위에 앉을 때 무릎에 올리면 쿠션보다 훨씬 좋다. 나는 이 물건을 박연준 작가님의 책에서 보고 알게 됐다. 역시 독서도 아이템빨이다.


대중교통을 탈 때 사람들은 블루투스 이어폰이 필수라는데, 나는 용도 별 책을 챙긴다. 이른바 나만의 책 OOTD. 여행할 때는 수필이 최고다. 짬짬이 시간은 나지만, 길게 읽을 시간은 분명 나지 않을 것이다. 낮 시간에 읽을 수필, 밤 시간에 읽을 이북. 터널이 계속 반복되는 강원도 쪽으로 여행을 갈 때는, 단연 이북이 최고다. 잦은 터널 진입으로 어두워져도 상관없이 독서를 이어갈 수 있기 때문이다. 지하철을 탈 때는 유유출판사의 말들 시리즈를 챙긴다. 100개의 챕터에 장 마다 메시지가 있고, 작고 가볍다.


가방을 살 때의 기준은, 책이 안정적으로 들어갈 수 있느냐다. 아무리 작은 핸드백이라도, 작은 책 한 권쯤은 들어가야 한다. 텀블러는 포기하더라도, 물병은 포기하더라도, 책은 넣을 수 있어야 한다. 책 한 권도 못 들어가는 가방은, 필요 없다.





가장 난감한 순간은, 운전하면서 책을 보고 싶을 때다. 요즘은 오디오북을 접할 수 있는 서점이 많이 있고, 지역 도서관에서도 오디오북을 대여해 준다. 잘 찾아보면 유튜브에도 유명 성우들이 낭독한 책이 많이 있다. 모두 몇 번 시도해 봤는데, 실패했다. 기본적으로 라디오를 좋아하는 나는, 라디오에서 '누군가들'이 나와 대화를 해야 한다. 대화 없이 쭉 책을 읽는 포맷은, 자꾸 딴생각이 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 책을 읽는 사람의 목소리. 예쁜 목소리어야 하는 건 아닌데, 뭔가 나는 책마다 그 책에 어울리는 톤 앤 매너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몰입이 되지 않는다. 유명인의 목소리 일부로 구성된 AI북도 있는 걸로 아는데, 정말 자연스럽지만 몰입은 되지 않았다. 실감 나게 읽는 것과는 다른 문제다.


얼마 전 <팟캐스트를 듣다가>라는 책을 알게 됐다. 찐 팟캐스트 덕후인 저자는, 현존하는(?) 책 팟캐스트를 낱낱이 듣고 리스트업해 줬다. 난 저자의 족적을 따라, 열심히 듣는 중이다. 이미 지나간, 휴방 중인 팟캐스트도 좋다. 책이란 것이 원래 본디 고전적인 구석이 있어서, 꼭 신간을 읽어야 할 필요는 전혀 없다.


그래서 요즘 운전하면서도, 청소하면서도, 심지어 러닝머신을 달리면서도 독서 팟캐스트를 듣고 있다. 듣다가 중요한 책 소개가 나오면 메모도 하고, 핫한 작가가 게스트로 나오면 속으로 물개 박수도 치고, 하면서.




부모님께서 서울 근교에 작은 집을 짓고 계신다. 주말 농장에 푹 빠져 지내시더니, 이렇게 됐다. 아주 작은 집인데, 우리 가족은 올해 추석을 그곳에서 보낼 생각에 모두 부풀어 있다. 엄마는 시골 밤하늘이, 아빠는 하루하루 다르게 자라는 농작물이, 내 남편은 시골길 달리기가 좋아 그곳이 좋다면. 나는 2층 작은 방에서 읽을 책들이 너무나도 고대된다. 햇살 가득한 방에서 푸른 초목을 바라보며, 매연 없고 소음 없는 조용한 그 방에서, 마음껏 어디 한번 읽어봐야겠다.


역시 내 인생에 좋은 시간이란, 책이 함께하는 시간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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