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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gnes May 04. 2023

병원에서 만난 사람들

대학 병원에 정기 검진을 간 날이었다. 보통은 진료실 복도에 사람이 빼곡히 앉아 있기 때문에, 나는 "다음 진료 순서입니다."라는 문자가 올 때까지 출구 쪽 넓은 곳에 앉아 기다린다. 하지만 그날은 왠지 시간대가 잘 맞았는지 그냥 운이 좋았는지 진료실 복도가 한산했다. 그래서 진료실 바로 앞에 앉아서 책을 읽고 있었다.


내가 진료를 받는 과는 진료과 특성상 젊은 여자 환자들이 대부분이다. 대부분 혼자 오고, 간호사와의 대화도 간결하고 신속하게 이루어진다. 그런데 바로 맞은편에 내 어머니 나이의 환자 한 분과, 아들 며느리로 보이는 내 또래 부부가 앉아 있었다. 조용한 날이어서 복도에 앉아 있는 몇몇 환자들은 그들의 모든 대화를 시간 순서대로 듣게 됐다.


그랬대매. 그러니까. 그래서 병원은 주기적으로 다녀 줘야 돼.
여기저기 자주 다녀봐야 병도 빨리 발견하고 그러지.
어무니도 봐.
동네에서 미심쩍은 게 있으니 딱 발견하고 자기가 감당 안되니까 큰 병원 가 보라고 소견서를 바로 써 주지. 일단 진료를 받아 보고.....


암 전문 담당 교수의 진료실 바로 앞에 앉은 할머니 한 분과 아들 내외. 긴장한 목소리와 눈빛의 그들은 한 말 또 하고 또 하고, 환자의 이름을 부르면 셋이 한꺼번에 일어나고 앉고, 옆에 앉은 우리가 다 초조할 지경이었다. 그리고 드디어 그들이 진료실에 들어갔다 나왔다.


어유 다행이다. 진짜.
이게 지가 보기에 별거 아닌 거야.
그러니까 신경 쓰이면 조직검사나 한번 해 보자고 하지.
저 냥반은 큰 병을 하도 많이 보니까 이런 게 별거 아닌 거지. 딱 보면 알지, 그럼.


아부지? 어 지금 들어갔다 나와서 기다리는 중이야.
검사 날짜 잡으려고. 어 별거 아닌데 그냥 혹시나 해서 검사는 받으래. 지가 보기에...


그들은 큰 소리로 아우성치며 말하지 않았다. 그냥 안도한 가족들의 대화 내용에 내가 다 마음이 놓일 지경이었는데 다만 의사를 '지가'라고 말하는 것이 약간 신경이 쓰였다. 뭐 이 대화의 맥락상 그게 아닌 건 알지만, 그래도 간호사들도 다 듣는데 '지가'는 좀...이라고 생각하던 차에, 다시 셋이 모여 또 같은 말을 반복하다가는 앗차 싶었는지 다시 더 작게 소곤소곤 말하기 시작했다.


선생님이 보기에 별거 아닌 거지.......


아, 이 귀여운 가족들을 어찌해야 하나. 대학병원을 주기적으로 다니다 보니, 여러 형태의 환자들을 보게 된다. 가끔은 노인 내외가 와서 전공의로 보이는 젊은 의사들을 호통치는 것을 본다. 또 가끔은 반대로 얼토당토 한 말을 하며 바쁜 의료진의 애를 태우는 환자들을 본다. 적어도 80은 넘어 보이는 환자가 씩씩하게 혼자 백팩을 메고 와서 능숙하게 여기저기를 찾아다니는 모습을 보기도 하고, 걷지도 못하는 환아를 안고 병원 로비를 하염없이 배회하는 젊은 엄마를 보기도 한다.


병원에 가면, 그들 모두가 내가 아는 사람 같다. 번호표를 뽑긴 했는데 전광판은 볼 줄 모르는 할아버지에게 말을 걸게 되고, 입원 생활에 지쳐 로비로 놀러 나온 아기에게 (코로나 시국에) 뭐라도 간식을 주고 싶어 가방을 뒤적인다.


병원에 온 장년과 노년의 가족이 그렇게나 단란해 보이기는 처음이었다. 긴장해 나누는 대화가 도란도란 말소리로 들렸고, 그 와중에 말을 골라야 함을 깨닫고 또 바로 말을 고치는 가장의 모습은 또 얼마나 귀여웠는지.


가족이란, 그런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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