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성선설을 믿는다. 사람은 본디 선하다. 그런데 사는 게 너무 팍팍해, 사람들이 점점 본인의 선한 본성을 잃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무언가가 또는 누군가가 선한 본성을 일깨워주면 누구나 다 조금씩 본성을 찾아간다.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나에게 있어 나의 선한 본성을 일깨워주는 것은 책이다. 책이라는 물건 자체에서 시작해 책을 사는 것, 책을 볼 때의 색감, 만질 때의 질감, 책을 읽을 때의 기분, 그리고 책 속에서 발견하고 느끼는 모든 것. 그런 것들이 오늘의 나를 어제의 나보다 더 좋게 만든다. 책은 나를 위로하고 기쁘게 하고 살고 싶게 만든다.
최근 몇 달간 많은 일을 겪으며 '삐뚤어지고 싶다'는 생각을 자주 했다. '불행이 여러 번 다녀갔는데, 아직 안 끝났나' '트루먼 숀가' 이런 생각을 종종 하면서, '삐뚤어지고 싶다'라는 순간이 종종 있었다. 뭐, 그래봤자 내가 삐뚤어지고 싶을 때 집안일을 모두 손 놓고 자버린다거나, 약간 짜증이 날 때 짜증을 내 버린다거나 그런 일들이었지만. '삐뚤어지고 싶다'라는 생각이 자주 든다는 것 자체만으로, 나는 내가 생경하다.
어제 도서관에 갔다가 엣눈북스의 책 여러 권을 읽었다. 엣눈북스는 나의 책친구가 추천해 준 출판사인데, 동네 도서관에는 엣눈북스 책이 4권뿐이어서 일단 4권을 모두 빌렸다. 내 책친구는 직장 동료인데, 내가 일하는 곳의 특성상 책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참 많다. 우리는 도서관을 마트 보다 자주 가고, 팟캐스트 중 가장 좋아하는 카테고리는 책/독서이고, 방학을 좋아하는 가장 큰 이유는 밀린 독서를 할 수 있어서다.
어제 읽은 엣눈북스 책 4권
<휴게소> <있잖아, 누구 씨> <불행이 나만 피해갈 리 없지>는 그 자리에서 단숨에 읽고, <뼈>는 대출했다. 나의 책친구는 이렇게 좋은 책들을 어떻게 발견한 걸까, 이렇게 좋은 책들을 만드는 출판사는 또 어떻게 발견한 걸까.
삐뚤어지고 싶은 마음이 매일매일 차오르는 삶을 살던 와중이었는데, 제목부터가 내가 읽어야 하는 책이었다. <불행이 나만 피해갈 리 없지> 그치. 때로는 '내가 뭐라고' '나라고 불행하지 않으리란 법이 어디에 있나' 식의 접근은 매우 유용하다. 하지만 정작 내가 바라는 메시지는 '행운도 나만 피해갈 리 없지'.
<불행이 나만 피해갈 리 없지> 책은 영어가 병기돼 있었는데, 그래서 더 마음에 와닿았다.
불행이 나만 피해갈 리 없지. Bad luck does not discriminate.
행운도 나만 피해갈 리 없지. Well, Good luck also does not discriminate.
정미진, <불행이 나만 피해갈 리 없지>, 엣눈북스, 2019
불행이 나만 피해갈 리 없지. 불행은 차별하지 않아. 행운도 나만 피해갈 리 없지. 행운도 차별하지 않아. 불행도 행운도 공평해. 불행이 나만 겨냥하지 않았다는 증거는 너무 셀 수 없이 많다. 행운도 다른 사람만을 겨냥하지 않았다는 증거가 너무 많다. 나에게 온 그 많은 셀 수 없는 행운들을 떠올려 보면, 반대로 행운이 나만 겨냥했을지도 모른다는 그런 감사한 마음에 민망해진다.
가끔 정말 좋은 책은 원서를 함께 산다. 이 문구는 영어로 어떻게 쓰였을까, 영어로 읽으면 또 얼마나 말맛이 날까. 최근에 읽은 책에 '더럽게 춥다'라는 표현이 있었다. 영어가 원서인 책이었는데, 영어로 '더럽게 춥다'는 과연 뭘까. 그 한 줄을 찾아보고자 원서를 살 수는 없고.
아무튼, 성선설을 믿고, 책이 나의 성선설에 대한 믿음을 확고히 해 준다는 마음으로 나는 책 선물을 많이 한다. 하지만 종종, 그건 너무 읽는 사람 기준의 판단 아니냐며, 세상에는 책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사람도 많다는 이야기를 많이 듣는다. 책을 안 좋아하는 사람에게 책 선물은 무례할 수도 있다고. 그럴 수 있다는 것 아는데, 내 책이 잠깐 반짝하고 내 지인의 거실 한 구석 어딘가에 고요히 잠들 수도 있다는 우려도 간혹 하는데, 그러면서도 나는 책 선물을 많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