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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gnes Nov 17. 2023

K며느리의 노년

12. 가족각본

가족의 부동산 거래를 대행(위임)하게 되어, 작은 아파트 전세 계약을 하러 부동산에 갔다.

세입자는 60대 초반의 남자였다. 집을 보러 올 때부터 형님과 형수 등 한 동네 사는 가족들이 함께 다녔다더니, 계약서를 쓰는 당일에도 형님 내외분과 함께였다. 부부는 60대 후반에서 70대 초반쯤 돼 보였다. 아니, 더 많으시려나. 세입자는 사인을 하는 손이 살짝 떨렸고, 집주인의 권한을 위임받은 나와는 눈도 마주치지 못하고 말도 섞지 않았다. 모든 것이 약간 부자연스러웠다. 맞다. 인지가 조금 부족하신 것 같았다. 나는 부끄럽지만 뭔가, 불편한 마음이 들었다.


동석한 형수는 60대 중후반으로 보였는데, 능숙하고 재빠르고 신사적이었다(사실 나이가 더 많으실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든다). 그녀는 시동생의 휴대폰으로 모바일뱅킹을 순식간에 대신했고 각종 문서도 부동산 중개인의 리드에 맞춰 잘 따라왔다. 계약 당사자인 내게, 이런저런 설명과 인사말을 하는 것도 딱 적당했다. 혹시 뭔가 계약에 문제가 생기진 않을까, 내가 불안해하지는 않을까, 그런 생각을 했는지 이런저런 부가 설명을 쉴 새 없이 했다. 모든 가족이 한 동네 살고 있으며, 본인들은 이 근처 어느 아파트에 살고 있고, 시동생도 이 근처 어느 아파트 집주인인데 그건 월세를 놓았고, 혼자 사는 남자이니 집은 깔끔하게 쓸 것이고, 자기가 대신 살림 등 모든 것을 챙길 것이고 등등.

그리고 마지막에는 계약서 한 귀퉁이에 자기 이름과 전화번호를 적어 주었다.


그녀는 K며느리였다.

어르신으로 불릴 나이시지만, 그녀는 여전히 K며느리였다. 아마도 그녀는 젊었을 적부터 시동생의 온갖 것들을 챙겨 왔을 것이다. 내 엄마가 그랬던 것처럼, 자기도 어리면서 더 어린 시누이와 시동생들을 건사해 공부시키고 독립시키고 결혼시키고 그렇게 사셨을 거다. 그리고 여건 상 독립하지 못한 동생이 있다면 이렇게 노후까지 쭉 함께 가고 있을 거다. 평생 끝나지 않는 돌봄.


가족각본이라는 책을 읽었다. 다음은 책의 서문이다.


가족이 견고한 각본 같다는 생각을 한다.
그 각본에 따라 우리는 태어나면서부터 딸 또는 아들로서의 역할을 기대받고, 성인이 되면서 아내와 남편, 어머니와 아버지, 며느리와 사위 등의 역할을 맡는다.
하지만 가족각본은 평소에 잘 드러나지 않는다. 대개의 경우 우리는 정해진 각본대로 따르는 걸 평범한 삶이라고 여기고 질문조차 하지 않는다. 익숙하고 당연하게, 때때로 버겁게 정해진 역할을 수행하느라 가족각본이 어떻게 쓰여 있는지 살피지 못한다.

김지혜, <가족 각본>, 창비, 2023


서문부터, 밑줄이 그어졌다. 나는 각본 속에 있었구나. K며느리, K장녀, K장남 등등. 한국 문화 속 가족 안에서 일어나는 모든 역할 들은, 잘 짜인 각본이었구나. 나는 각본의 완성도를 부정하고 싶지는 않다. 나는, 가족을 사랑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작용-반작용의 법칙 또한 인정한다.


한국학중앙연구원에서 발간하는 <한국민족문화 대백과사전>에서는 전통적인 의미의 '며느리'에 관해 이렇게 설명한다. : 며느리의 도리 첫째는 시부모에게 효도해야 하고 집안을 화목하게 이끌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남편에 대한 질투를 버려야 하고, 멀고 가까운 친척들을 아끼고 섬겨야 한다. (중략)

며느리가 담당해야 하는 역할이, 마치 어느 회사의 업무분장표를 보는 듯하다. '며느리'라는 것이 단순히 아들의 아내라는 가족 내 관계를 지칭하는 게 아니라, 미리 부여된 업무를 담당하는 가족 내 '직위'임을 알 수 있게 한다. 그리고 그 역할은 간단치 않다. 시부모에게 효도하기, 집안을 화목하게 이끌기, 친척들을 아끼고 섬기기, 집안 제사 받들기, 정성을 다해 손님 대접하기, 가사노동에 힘쓰기, 살림살이에 근검절약하기 등, 집안팎의 사람을 만족스럽게 대접하고 갈등을 예방하고 해결하며 행사를 주관하면서도 비용을 절약해야 하는 고도의 능력이 필요한 역할이다.

같은 책, 1장 왜 며느리가 남자면 안 될까, 25쪽


책에서 다루는 범위는 사실 더 넓다. 한국 사회의 결혼과 출산의 공식, 그로 이한 차별, 그에 대한 왜곡된 시선, 성역할 등. 하지만 나는 서문에서 다룬, 1장에서 다룬 '며느리' 부분이 가장 크게 와닿았다.


시댁이 생긴 지 16년 차. 내가 돌봐야 하는 가족이 생겨 이런저런 대소사와 자잘한 일들이 점점 더 많아진다. 우리는 얽히고설켜 산다. 그들이 나를 돌본 것도 맞으니, 우리는 서로 K가족이다.


(부동산에서 잠시 만난) K며느리로 늙고 계신 어르신을 생각하며, 나는 상상하고 바랐다. 어르신의 기나긴 노동으로 인해, 어르신은 가족들에게 존경받고 있겠지. 집안 구성원 모두 가정의 평화에 어르신의 희생이 있었음을 십분 알고 있겠지. 그러니까 그렇게 가족 모두 편안해 보였겠지. 다소 인지가 부족해 보였던 시동생 분도, 형수 말이라면 덮어 놓고 믿고 따르는 그런 관계이겠지. 긴 세월 아껴주고 챙겨줬다고 해서 모두 그 감사를 알아채고 감사한 마음을 갚으며 살지는 않는데, 그 가족은 그런 갈등은 전혀 없겠지. 그리고 남편 분에게는, 자신의 동생과 자신의 가족에 없어서는 안 되는 그녀는, 귀한 아내로 사랑해 주고 계시겠지.


그런 걸로 충분치 않지만, 외람되지만, 그거라도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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