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다정한 며느리다.
며느리로서만 그런 것은 아니다. 그냥 나는 그렇게 태어났다. 태어날 때부터 그랬다. 나는 관찰 능력이 뛰어나고 주변을 잘 살피는 성향이고 공감력도 높다. 내 스스로 당당하게 다정한 며느리라 말하는 것에 대한 변을 나는 이렇게 해 본다.
하지만 어머니가 조금만 서운하게 할라 치면 '흥' 하는 마음이 바로 든다. 그리고 나는 언제든 돌아설 수 있다고, 나는 아들이 아니고 딸이 아니므로 필수가 아니라 선택이라고, 마음으로 토라진다. 다정한 며느리 역할에 충실하게 나는 대부분 세상 살갑게 굴지만, 쉽고 빠르게 마음속으로는 이랬다 저랬다 한다. 그냥 마음인데 뭐, 어쩌랴 싶은 생각이다.
나는 딸이 아니라 며느리구나. 그래, 나보다는 아들과 손주가 더 귀하고 좋지. 그런 마음이 들 때가 있다. 아들 손주를 반갑게 맞이하고 나서, 정신이 난 다음에, 그때서야 한 공간에 나도 있었던 걸 알아채실 때. 그럴 때 나도 알아챈다. 어머니의 마음을.
하지만 나에게 너무 허물없이 구실 때, 나는 그것이 불편하다. 나는 며느린데 왜 저러시나, 나는 아들도 딸도 아닌데. 15년 함께 가족으로 살아놓고도, 흉허물없이 지내게 내가 만들어 놓고도, 어머니께서 그렇게 나오면 나는 기분이 좀 상한다. 완전히 코에 걸었다 귀에 걸었다 내 마음대로다.
어머니가 너무 허물없이 굴라 치면 너무 가깝긴 싫다고 물러서고파 하고, 또 며느리라고 선을 그을라 치면 서운한 마음이 올라온다. 그럴 때 나는 속으로 나에게 말한다. 하나만 하자, 하나만. 그냥 적당한 며느리로 남든가 다정하려면 끝까지 다정하든가.
어쩌면 이렇게 내가 내 입장을 정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 자체만으로도 이미 나는, 며느리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래서 내가 다정할 수 있는지도. 언제든 그것을 핑계로 도망갈 수 있으니까. 아무도 나에게 왜 도망가냐고 말하지 않을 것을 아니까.
가끔, 하루종일 어머니를 간병하다 보면, 하루에 한두 번쯤 어머니가 잠깐 짜증을 부리실 때가 있다. 한... 5초 10초쯤인데, 그때 나는 잠깐 당황한다. 병실 안 한 칸 커튼 속에 갇혀 먹고 자고 주사 맞고 볼일 보고 모든 것을 다하는 어머니가 안쓰러우면서도, 나는 그럴 때 당황한다. 그리고 어머니도 곧 알아채신다. 본인이 짜증을 냈고 내가 당황했다는 것을. 그리고 눈치를 보신다. 내 눈치도 보고 주변 사람들 눈치도 본다. 이제 어머니도 병원 생활에 익숙해지셨는지, 간호사를 대하는 것도 낯설어하지 않으시고 옆 침대 간병하는 사람들 눈치도 보신다. 결국, 모든 걸 다 경험하고 가실 건가 보다. 세상 노인들이 다 겪는 그것을.
어차피 나는 잠깐의 간병인이다. 나는 3일 이상 그런 간병을 해 본 적이 없다. 나는 생각한다. 나를 낳아준 내 어머니 아버지인들 이런 상황이 되면 서로에게 짜증이 안 날까. 아니 서로 편하니까 더할 텐데, 90 노인이 5초 10초 짜증 내는 게 뭐라고. 그건 당연한 것 아닌가. 그리고 내 어머니 아버지라고 해서 간병이 쉽고 좋을까. 결코 쉽고 결코 좋지 않을 거다. 다 큰 노인, 아니 다 나이 먹은 노인의 몸을 만지고 닦고 처리한다는 것은 내 부모라고 해도 쉽지 않은 일일 거다. 나는 요즘 이런 생각의 단계를 여러 번 반복한다. 그리고 잊는다. 병원을 나서면 하루에 열 번쯤 생각하다가 다음 날이면 일곱 번 여덟 번으로 줄고 또 다음 날이면 네 번 다섯 번으로 준다.
잊을 수 있으니, 살 수 있나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