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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gnes Mar 03. 2022

경쟁과 무관한 욕망이 괜찮은 나이

4. 카페에서 공부하는 할머니 : 심혜경

평소에 책 쇼핑을 즐겨하는 편이다. 예기치 않은 여유 시간이 생겼을 때, 우울한 어느 날 분위기 전환이 필요할 때, 운전대를 잡았는데 갈 곳이 없을 때... 언제든지 서점을 찾는다. 요즘은 곳곳에 독립서점이 많이 생겨서, 여행지에서도 독립서점을 찾아가 보는 게 소소하고도 큰 재미가 되었다.


책 아이쇼핑을 할 때는 일단 책 제목을 훑어본다. 주머니에 손을 넣고, 두근두근 기대하는 마음으로, 언제든 내 손으로 들어올 수 있는 예쁜 책들을 사랑스럽게 바라보며, 매대를 주욱 훑어본다.

제목에 '할머니' 또는 '노인'이 들어있다면 2단계에 돌입, 손으로 들어서 펼쳐 보고 질감을 느껴 보고 목차를 읽어 본다. 어릴 때 부모님 대신 나를 키워주신 할머니가 계시다거나, 지금껏 애틋한 정을 나누고 있는 할머니가 계신 것도 아닌데, 나에게 '할머니'란 단어는 왠지 조금 그러하다. 애틋하고 아련하다.


원주에 있는 작은 독립서점 #시홍서가를 방문했다가 이 책 '카페에서 공부하는 할머니'를 발견했다. SNS에서 요즘 종종 보던 책이기도 하고, 부제목이 매우 마음에 들어(인생이라는 장거리 레이스를 완주하기 위한 매일매일의 기록) 펼쳐봤다. 그리고 5초 만에 처음부터 끝까지 읽어 보고 싶어졌다.


이 책은, 저자의 끊임없는 공부에 대한 이야기다. 4개의 언어를 8년 동안 공부했고 공부의 결실로 번역가도 되었다. 공부를 좋아하는 것은 물론이고 여러 가지 배우는 것을 즐기기 때문에 악기나 손으로 하는 작업들도 배운다. 저자의 나이는 64세. 사실.... '할머니'라고 부르기에는 젊은 나이라고 생각한다. '카페에서 공부하는 할머니'라는 제목을 보고 나는, 정말 호호 할머니가 지팡이를 짚고 또는 허리를 구부정하게 숙이고 돋보기를 끼고 두꺼운 숄을 두르고 우아하게 카페에서 책 읽는 할머니를 상상했었나 보다.


 '할머니'라는 단어의 1번 뜻은 조모(祖母), grandmother이다. 즉, 부모의 엄마다. 2번 뜻은 '부모의 어머니와 한 항렬에 있는 여자를 통틀어 이르는 말'이다. 항상 관계 속의 삶이 먼저인 나는 자연스럽게 1번을 생각했고, 1번보다는 2번의 내용인 책을 읽으며 책 내용이 더 마음에 들게 되었다.




책을 향한 나의 터무니없고도 열광적인 사랑이 언제 어디에서 비롯되었는지 가끔 궁금해지는 때가 있다.
하지만 많은 독서가가 그러하듯, 책을 의식하기 시작한 이후로는 언제나 책이 옆에 있었기 때문에 어떤 책을 읽고 사랑에 빠지게 되었는지는 기억할 수 없다. 문자로 된 온갖 것들을 산만하게 읽어대다 보니 초등학교 국어 교과서 외에 처음으로 읽은 책의 제목도 생각나지 않는 상황이다.
누군가 나에게 "넌 국어 교과서를 읽고 스탕달 신드롬stendhal syndrome(뛰어난 미술품이나 예술 작품을 봤을 때 순간적으로 느끼는 각종 정신적 충동이나 분열 증상)을 겪었어"라고 해도 반박하지 못할 것이다.

(166쪽 12. 책을 읽지 않는 것은 어떤 느낌일까 中)


내 인생을 스쳐간 여러 명의 상사 중 한 명이 어느 날 갑자기 내게 이런 질문을 했다.


"OO야, 너는 지금 당장 인생이 끝난다면, 네 인생에서 가장 아쉬운 게 뭐니? "
"독서요."


그 당시 나는, 하루에 한 페이지도 읽지 못하고 사는 삶에 대해 심각한 고민을 하고 있었다. 퇴근 후 책 한쪽 읽지 못하는 삶이라니, 나의 남은 직장 생활 또한 이러할 건가. 삶의 의미란 무엇인가. 아마 그때 나는 직장인의 삶뿐 아니라 육아에 지쳐있었고 그래서 더 옴짝달싹할 수 없이 인생이란 설계할 수 있는 그 무언가가 아니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러게, 책을 읽지 않는 것은 어떤 느낌일까.


하지만 나는 욕심이 많은 게 아니라 하고 싶은 일이 많아서 이러고 산다. 어떤 직업을 가질 것인지를 더는 고민하지 않아도 되는 나이에 도달한 지금은 내 앞에 굴러오는 모든 것들을 아무런 제약 없이 골라잡을 수 있어 행복하다. 경쟁과 무관한 욕망을 가져도 괜찮으니까. 물론 나 역시 돈 들여 배우는 공부보다는 배워서 돈이 되는 공부가 좋다. 설마 돈을 벌고 싶지 않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을까? 그럴 리가!

(책 190쪽. 맺음말, 하루하루는 되는 대로, 인생은 성실하게 中)


경쟁과 무관한 욕망을 가져도 괜찮다니, 생각만 해도 너무 편안하고 즐겁다. 나는 여태껏 무언가를 배우고 싶다는 마음이 들 때, '이제 배워서 뭐할까, 뭐 하는데 쓸까?' 이런 의문을 가지고 있었는데, 사실 어디에도 쓰지 않을 걸 배운다는 건 정말 자발적이고 주체적이라는 느낌이 드니 이렇게 자유로울 수가 없다.


예전에 예전에 직장 동료가 퇴사하며 이런 말을 했었다. "나는 이제, 더 이상 프로의 삶을 살고 싶지가 않아요. 남은 인생은 아마추어만 할 거예요." 아직 젊었던 나는, 정말 멋진 말이라는 생각이 들면서도, '이 친구는 이제 경쟁하는 삶이 지겨워졌구나. 나는 아직 도전하고 경쟁하는 삶이 짜릿할 때도 있는데...' 그런 생각도 했던 것 같다.




190쪽의 얇고 작은 책이기 때문에, 금방 읽을 수 있을 거라 생각한 책에는 군데군데 인덱스가 붙으며 다시 읽고 다시 읽게 되었다. 저자가 추천해 준 여러 가지 외국어 공부법도 시도해 봐야 하고, 저자가 추천해 준 외국어 배우기 좋은 드라마들도 찾아봐야겠고, 저자가 추천해 준 여러 번역서도 찾아 읽어 봐야겠다. 나는 이런 경우를 '책이 책을 낳는다'라고 한다. 그렇게 마음이 맞는 작가의 세계관 속으로 들어가는 것도 독서의 즐거움 중 하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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