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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gnes Mar 31. 2024

쉽지 않은 엄마

드디어 내 아이가 고등학생이 되었다.

아이는 등교 첫날부터 학교에서 중식, 석식을 먹고 야간 자율학습까지 하고서야 집에 왔다. 저녁 10시 30분에 귀가하는 아이의 얼굴을 보고 나는 이렇게 말했다.


"도현아, 너 얼굴이 썩어서 왔다..."

아이는 격하게 수긍하며 말했다.

"정말 그래. 안 썩을 수가 있겠어? 학교에서 14시간을 있었는데."


그로부터 한 달이 지났다. 아이는 새벽에 눈도 안 뜨고 밥을 먹고, 어질러진 방에서 숨은 그림 찾기 하듯 각종 준비물을 가방에 욱여넣고, 모든 옷을 입을 새도 없이 몸에 차곡차곡 걸치고, 현관문을 뛰쳐나간다. 하루종일 학교에서 먹고 공부하고 졸고 운동하고. 10시에 야간 자율학습이 끝나면 또 다른 하루가 시작된다. 아이의 학교는 낭만적이게도 숲 속 언덕 위에 있다. 열여섯 살 남자아이들은 달빛에 걸으며 도란도란 이상한 말들을 나누며 편의점도 가고 운동기구가 보이면 철봉도 한 번씩하고 그렇게 이십 분 걸릴 거리를 한 시간 걸려서 걸어 내려온다.


여기까지는, 낭만 도현이 이야기다.


열여섯 아이는 종종 반항 도현이가 된다. 도대체 어디까지 예민해질 건지, 도대체 엄마인 내 말을 듣고 있기는 한 건지, 도대체 언제쯤 사춘기가 끝날 건지. 사춘기 아이와 잘 지내는 것은 어려운 일이라고, 사춘기 아이와의 하루하루는 쉽지 않다고, 그런 이야기를 정말 많이 들었다. 그리고 나도 중학생 아이와의 하루하루가 쉽지 않다고 글을 쓴 적이 있다. 당연하게도 나는 아이의 머릿속을 반도 짐작 못 하고 있고, 어쩜 아이를 이해하고자 하는 것은 나의 헛된 희망이 아닐까 그런 생각까지 하기에 이른다.


그런데 어느 날 밤 문득, 그 생각이 들었다.

대체로 내 아이는 크는 동안 줄곧 키우기 쉬운 아이였다. 기질적으로 그렇게 태어난 아이여서, 항상 잘 먹고 잘 자고 잘 지냈다. 그래서 나는 아이와의 갈등에 대한 내성이 없다. 아이에게 사춘기가 왔을 때, 내가 아이와 잘 지내기 위해 무언갈 참았던 적이 있었나? 생각해 보니 별로 없었다. 내 아이는 키우기 쉬운 아이였던 것이다.


그런데 나는 어떤가. 나는 아이에게 쉽지 않은 엄마임이 분명하다. 요즘 자주 그런 생각을 한다. 대체로 아이가 야간자율학습을 끝나고 집에 오면, 집은 고요하다. 아이가 간식을 먹는 십분 남짓, 그 시간을 빼고는 다시 집이 고요해진다. 아마 아이의 기억 속 엄마는 항상 책을 읽거나, 컴퓨터로 무언갈 하고 있을 거다. 잠들기 전 인사하러 온 아이는, 항상 내 얼굴이 아니라 내가 들고 있는 책의 등을 먼저 본다. 어제는 내가 들고 있는 책이 <시어머니의 유품정리>인 것을 보고, 실소하며 말했다.


"어이구, 시어머니에 대한 책을 쓰더니. 이번엔 유품정리야?"


혹시나 아이는 항상 텔레비전이 켜져 있는 시끌벅적한 집을 더 좋아하지 않을까, 그게 더 자연스럽지 않을까. 항상 준비하고 계획하는 엄마보다 닥쳐서 해결하는 엄마가 더 편하지 않을까. 어떤 일의 이유를 말이 되게 설명해 내라는 엄마보다, 논리가 엉망이어도 대충 듣고 수긍해 주는 엄마가 더 쉽고 편한 엄마가 아닐까. 일요일에도 아침 일찍 일어나 제시간에 밥을 차려 주고 제시간에 학원을 데려다주는 엄마보다, 종종 같이 늦잠을 자 버려 둘이 함께 깔깔 웃으며 늦은 아침으로 라면을 끓여 먹는 엄마가 더, 좋은 엄마가 아닐까.


브런치에 이런 이야기를 쓰고 있는데, 주인공이 지나가듯 말한다.

"브런치에 또 내 이야기 그런 거 쓰지 말고~"


들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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