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미술재단 아트버스카프의 미술사랑 2022 5월호에 게재한 글)
예술은 “그리움”에서 출발한다. 그리움은 몸의 아주 오랜 기억과 관련된 마음의 문제로서, 그 엑기스는 “멜랑콜리”다. 그래서 어떤 이론가는 멜랑콜리를 “영혼의 검은 멍”이라고 부른다. 작가가 먹고사는 것이 바로 멜랑콜리다.
멜랑콜리는 사랑과 죽음이 스쳐간 자리에 “아무것도 없음”을 보았을 때 생기는 고통스러운 감성이다. 이 감성의 영역을 가르는 경계선이 있다. 경계선 이쪽에서 멜랑콜리는 무(無)를 응시하고 관조하는 지혜로운 정서이며, 고통은 삶의 의지와 에너지로 승화한다. 경계선 저쪽에서 멜랑콜리는 무에 대한 환멸감과 두려움 및 극심한 죄책감으로 농축되고, 고통은 우울증이라는 병으로 진행한다.
작가에게는 창작 욕망이 있다. 이 욕망이 그의 멜랑콜리를 경계선 이쪽에 머물게 하고, 백상현이 말하는 것처럼 “우울증으로의 파국을 지연”시킨다. 그러나 작가의 감성이 지나치게 격렬하면 그의 멜랑콜리는 저편으로, 우울증의 늪지대로 범람한다.
뭉크 (Edvard Munch: 1863-1944) 작품의 인물은 만사가 무의미하게 느껴지는 극심한 무기력과 권태에 지쳐 있다. 김동규의 표현대로 “몸이 의식에 갇혀”있는 상태다. 감상자는 직관적으로 그림 속 이야기가 작가 자신의 이야기임을 안다. 반면에 피카소 (Pablo Picasso: 1881-1973) 작품의 인물은 통곡을 하지만, 감상자에게는 그 슬픔이 병적으로 느껴지지 않는다. 작가가 비통해 하면서 그렸다는 생각도 안 든다. 그저 작가가 마음껏 자유롭게 그렸다는 확신을 준다.
멜랑콜리는 본래 서구적 감성이다. 그러나 검은 담즙(멜랑콜리의 원래 의미)을 뚝뚝 떨구는 기형도(1960 - 1989)류의 예술이 우리의 사랑을 받은 지 이미 오래다. 멜랑콜리는 더 이상 낯선 정서가 아니다.
작가의 기분은 “정상”과 “비정상”을 수시로 왕복한다. 예술의 여신 뮤즈에게 작가의 멜랑콜리가 건강하냐 아니냐 하는 것은 사소한 문제일 것이다. 뮤즈가 이토록 매정하기에, 그녀를 짝사랑하는 작가는 사람을 그리워할 때 못지않게 멜랑콜리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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뭉크 <저녁__ 멜랑콜리 I, 1896>
MoMA
https://www.moma.org/collection/works/73795
피카소 <우는 여자 I, 1937>
MoM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