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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채한리 Chae Hanlee Dec 06. 2023

살아있는 자가 죽음에 대해 생각한다는 것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하였다> 읽기 22


살아있는 자가 죽음에 대해 생각한다는 것 



짜라투스트라는 말한다:  " 죽어야 할 때 죽어라! " 1

그러나 살아있는 자가 알아서 죽어야 할 때란 언제란 말인가? 

짜라투스트라의 이어지는 질문 속에 해답의 실마리가 들어 있다.   

" 살아야 할 때 살 수 없는 자가 어떻게 죽어야 할 때에 죽을 수 있는가? "  2


"살아야 할 때 산다"는 것은 삶을 극한까지, 영혼을 그 바닥까지 

열정을 다해 살아버려 소진시킨다는 것이다. 

삶의 극한에 있는 절벽, 삶의 절정에서 '몰락'하는 것__그것이 짜라투스트라가 말하는 '죽음'이다. 3


그러나 여전히 생각의 중심은 삶으로 건너와 버렸다. 

죽음의 문제는 '죽음'을 생각하지 않아도 되는 방식으로 해결된 모양새다. 

이 즈음에서 심리분석가들은 죽음이 삶을 구성하는 근본 축, 본능, 욕구라고 한껏 띄우지만, 

이것은 내가 원하는 대답이 아니다.  

나는 삶의 방향에서가 아니라, 죽음의 방향에서  '죽음'을 알고 싶다. 


하지만 살아있는 내가 삶과 분리해서 죽음 그 자체를 아는 것은 불가능하다.

죽음은 기껏해야 살아있는 자의 의식의 대상일 뿐, 결코 체험의 대상이 될 수 없다.  

죽음에의 욕구, 죽음의 성향, 죽음을 향한 본능 등은 체험될 수 있다.  

그러나 죽음 그 자체는 '체험'이라는 얄상한 말로 그 의미와 의의를 다 담을 수 없는 삶의 마지막 현실이다. 

죽음을 아주 친숙한 것인 양 말하더라도, 

즉 '죽을 때가 되서만이 아니라 인간이 일상적으로 대면하게 되는 막다른 길'이라고 

하이데거식으로 말하더라도 그렇다. 


그렇다면 '죽음의 이해를 체념한다' 4는 말이야말로

삶의 극한에서, 절정에서 몰락하는 자만이 진실하게 말할 수 있는, 

그것도 몰락하는 그 순간에만 비로소 내뱉을 수 있는  유일하게 정직한 고백이 아닐까?  

세 토막난 상어가 부유하고 있는 데미안 허스트의 작품__ <살아있는 사람의 마음속에 있는 육체적 죽음의 불가능성, 1991 > 은 이런 고백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에코의 '깊이 생각해봐야 할 것은 오직 죽음뿐' 5 이라는 말에서 

'깊이' 그 자체는 

삶의 막바지, 극한, 절정, 몰락 직전의 순간에만 도달할 수 있는 그런 '깊이'가 아닐까? 



1.  니체,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하였다. P. 88

2.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하였다. P. 88

3.  이런 죽음은 바타유가 말하는 육체적 정열의 소진 뒤에 오는 에로틱한 의미의 '작은 죽음'이 아니다.  오히려 '진짜 죽음', '큰 죽음'을 의미한다. 

4.  김동규, 멜랑콜리 미학, p. 169

5.  에코, 장미의 이름 (상), p. 128에서  우베르티노가 한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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