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하였다> 27
제자들에게 이별을 고하고 재회를 약속하면서 짜라투스트라는 ‘위대한 정오’를 언급한다. ‘위대한 정오’는 ‘인간이 짐승으로부터 초인에게로 이르는 노정(?)의 중심점에서 그의 밤에의 길을 최고의 희망으로써 축복할 때’(1)다. 위대한 정오에서 이어지는 밤에의 길을 가는 자를 짜라투스트라는 '몰락한 자(者)'라고 부른다. 짜라투스트라가 성취한 위대한 정오의 위대한 각성은 “신들은 죽었다. 이제 우리는 초인이 살기를 원한다"라는 깨달음이다.
위대한 정오는 정신적인 깨달음을 추구해 온 사람이 최고의 각성을 이룬 순간이다. 이제부터의 삶이 지금까지의 삶과 질적인 면에서 완전히 다르리라고 확신하는 그 순간이다. “최선을 다했다. 이제 내가 할 일은 아무것도 없다”라는 말이 저절로 흘러나오는 순간이다. ‘위대한 정오’의 다음에 오는 것은 '몰락 (Untergang)'이다. 몰락은 ‘미래에로의 교량이 되려는 선각자의 ‘죽음’'을 암시하는 말이다. (2) 그런데, 짜라투스트라에게는 단순한 멸망, 파멸이 아니라 보다 나은 상태로의 이행을 위해 꼭 필요한 일시적인 하강이다.
예수도 자신의 죽음을 꼭 필요한 일로 생각했다. 그러나 예수와 짜라투스트라가 하강이나 몰락에 대해 말할 때 뉘앙스가 전혀 다르다. 예수는 “약속된 하늘나라를 생각하면 행복하다”라고 하면서도 당신께 닥칠 수난으로 인해 "지금 내 마음이 괴로워 죽을 지경이다" (3) 고 했다. 그러나 짜라투스트라는 이를 뒤집어 말한다. "새로운 새벽노을에의 도정(道程)으로서, 스스로의 정오(正午)와 저녁 때문에 …… 행복하다……." 곧 어두움으로 '몰락'하지만, 그 어두움이 새벽을 불러올 것이므로 행복하다는 것이다. '잔인한 우연, ' 혹은 '승리에 의해 준비된 멸망'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행복하다는 것이다. (4)
이제 짜라투스트라는 다시 산으로 올라간다. 그가 제자들과 재회하는 2부 이하에서는 신의 존재를 부정하고 초인을 택하는 것이 지금의 인간에게 가능한 일이냐 하는 관점이 전개될 것이다.(5)
(1) 니체,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하였다, p. 95
(2)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하였다, pp. 218-220
(3) 마태오 5: 11-12 / 19: 27-30/ 26: 36-40
(4)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하였다, pp, 218-235
(5) 이문열의 <사람의 아들>은 (낡은) 신을 버리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하는 문제를 제기한다. 소설에서 조동팔은 민요섭에 대해 술회한다: “(민요섭은) 신학의 탈개인화(脫個人化)든 혁명의 신학이든, 또는 그 이상 마르크시즘과 손을 잡게 되는 한이 있더라도, 우리는 ‘신 안에’ 남아 있었어야 했다고 (말했다). 불합리하더라도 구원과 용서는 끝까지 하늘에 맡겨두어야 했다고 (말했다). 우리는 무슨 거룩한 소명이라도 받은 것처럼 새로운 신을 힘들여 만들어냈지만, 실은 설익은 지식과 애매한 관념으로 가장 조악한 형태의 무신론을 얽었을 뿐이었다고 (말했다). 우리가 어김없이 신이라고 믿었던 것은 기껏해야 저 혁명의 세기에 광기처럼 나타났다가 조롱 속에 사라진 이성신(理性神)이거나 저급하고 조잡한 윤리의 신격화에 지나지 않았다고 (말했다). 그런 다음 (민요섭은) 과장된 참회(를 했으며)...... 십자가 아래로 돌아가겠다고 (말했다).” 이문열__사람의 아들__38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