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하였다> 읽기 30
'영원성'과 '시간성'
짜라투스트라는 영원성과 시간성 (時間性)은 우리의 경험세계 속에서 양립할 수 없다고 말한다. (1) 우리는 오직 변화와 흐름만을 경험할 뿐, 영원이나 불변은 결코 경험할 수 없다는 것이다.
물론 인간은 기필코 죽게 되어 있으며, 이처럼 죽어야 하는 인간은 '영원'을 염원할 수밖에 없다. 영원은 인간에게 결핍된 것이고, 인간이란 결핍된 것을 염원한다. 그러나 시인은 영원을 염원하는 노래를 부르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마치 자신이 지금 눈앞에서 영원한 것, 불변의 아름다움을 보고 있는 듯 노래한다. 짜라투스트라는 영원과 불변, 불멸을 노래하는 시인은 거짓을 말하고 있다고 한다. (2)
‘영원’이라는 불변의 세계, 고정됨의 세계는 생명의 탄생도, 변화도, 아름다움도, 풍부함도 없다. 생명의 탄생, 변화, 아름다움, 풍부함 등 인간이 체험하는 모든 좋은 것들은 (나쁜 것들도 마찬가지지만) ‘시간’을 매개로 해서만 가능하다. 하지만 ‘영원’이라는 세계에서는 ‘시간’이 축출되고 없다. 불모의 장소인 것이다. 그 불모의 장소에 만일 시인이 오게 된다면 그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 이 지루함을 견디기 힘들구나. 이곳은 ‘지옥’이다”라고 탄식하리라.
그런데 '변화와 흐름' 자체가 '영원'이라고 한다면? 그렇게 생각하면 '존재'로 불리든 '신'으로 불리든 영원한 것은 있다고 할 수 있다. (3) 변화하는 것, 흐르는 것은 분명 우리 눈앞에 끊임없이 계속해서 있기 때문이다. 변화하고 흘러가는 양상이 영원히 계속된다는 의미에서 분명 그렇다. 영원성과 시간성이 동시에 가능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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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니체,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하였다, p. 103f 참조
(2)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하였다, p. 103
(3) 하이데거는 '존재'를 '영원한 흐름'으로 이해했다. 또 이 진리를 언어로 표현하는 시인의 삶이 존재론적 삶이라고 생각했다. 니체도 변화와 영원을 동시에 구제할 수 있는 개념을 제시한다. 바로 무한한 '회귀(回歸: 다시 돌아옴)' 로서의 영원이다.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하였다, pp. 250-25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