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하였다> 읽기 31
'고뇌'는 '나와 너'를 포함하는 문제와 관련된 번민이다. 예를 들어, 너에 대한 사랑으로 내가 죽어야 한다는 데서 나오는 감정이 '나'의 고뇌인데, 여기에는 '너'가 포함되어 있다. 인간의 보편적 고통에 대한 이해가 '나'의 고뇌로 이어지는 경우에도 '너'와 '우리'가 포함되어 있다. 고뇌하는 사람은 고뇌의 원인이 되는 삶의 구조적인 문제를 생각하게 되고, 이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을 모색하게 된다. 즉, 고뇌자는 결국 창조자가 되는 숙명의 선상에 놓여있는 것이다.
짜라투스트라는 “창조를 하려면 고뇌가 사람됨 자체에 깊이 스며들어 있어야 한다” (1) 고 말한다. 창조자에게는 고뇌가 ‘있다’ 고 하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고뇌가 ‘있어야 한다’ 고, 더 나아가서 고뇌로 인한 진통이 있기를 ‘염원’ 해야 한다고 말한다.
"창조자 스스로가 새로 태어난 아이이기 위해서는 창조자 스스로가 여인이어야 한다. 또 진통(陳通) 있기를 염원해야 한다.” (2)
겉으로 보기에 창조자의 '고뇌로 가득 찬 삶'은 불안정하고 불행하게 보일 수밖에 없다. 경제적으로 그리고 사회적인 인정이라는 점에서 고뇌하는 창조자의 삶은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어설프게 보인다. 그리고 가까운 사람에게는 물론 자기 자신에게 무책임하게도 보인다.
그러나 경제적이고 사회적인 안정과 평화가 깃든 일상을 획득한 창조자가 있다고 치자. 그런 창조자가 오히려 불행을 느끼는 경우를 우리는 주위에서 종종 목격한다. 현실적인 생활인은 창조자의 이러한 불행을 이해하기 어렵다.
창조자가 안락한 생활에서 불행한 것은 그의 인성이 독특해서가 아니라, 창조의 필요조건인 '고뇌'가 증발해 버렸기 때문이다. 고뇌가 증발되어 바닥이 나는 것이야말로 창조자의 불행 중 가장 큰 불행이다.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 중 이반은 니체적인 인물이다. 조시마 장로는 신의 존재에 대해 깊은 의구심을 표현하는 이반을 질타하기는커녕 크게 축복한다. 장로는 이반의 고뇌가 이반의 행복의 원천임을 너무나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장로는 알료사에게 다음과 같은 유언을 남긴다: “(너는 장차) 크나큰 고뇌를 보(겪)게 될 것이며 그 고뇌 속에서 행복해질 것이다……. 고뇌 속에서 행복을 구하도록 해라. ” (3)
(1) 니체,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하였다, p. 103 f. 참조
(2)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하였다, p. 103
(3) 도스토예프스키__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 1__ 1부__2편 부적절한 모임, pp. 147-16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