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하였다> 읽기 33
“저들 (승려들)의 정신은 저들이 느끼는 연민의 정 속에 빠져 그만 목숨을 잃고 말았다.” (1)
짜라투스트라는 이들 승려들이 '연민’이라는 ‘작은 사상’에 잡혀 ‘위대한 사랑’ (2)을 하지 못한다고 하지만, 과연 그들이 ‘연민’이나 ‘동정’이라도 순수하게 느낄 수 있는 사람들일까? 그들의 연민이나 동정은 아무도 설복시킬 수 없는 ‘위장된 고뇌’ 아닌가! (3)
사원 앞에서 아이가 어머니 손을 잡고 가다가 이렇게 묻는다. “어머니, 우산을 쓰고 깨끗한 승복을 입은 저 스님은 비 맞고 쓰러져 있는 병든 걸인인 것 같은 저 노인을 왜 그냥 지나치나요? 저러다 노인은 죽을 것 같은데요? 다른 사람들처럼 저 스님도 그냥 지나치네요?” 그러자 어머니는 아이에게 말한다. “저 스님은 너무나 높으신 분이고, 또 바쁜 분이시고, 중요한 자리에 가는데 옷을 더럽히고 비에 적실 수가 없단다. 그리고 저런 거지 노인이 너무나 많지 않니? 일일이 다 구원할 수는 없단다.”
이 시대에는 승려도 직업의식을 갖고 있는 것 같다. 그런데 승려가 '직업인 혹은 직능인'임을 거리낌 없이 자처할 때, 독실한 신앙을 갖지 못한 사람도 가슴이 철렁해진다. 아 이제는 종교마저도! 하고 탄식을 하게 된다. 회색이나 검정의 단색으로 빼어 입은 승려들이 사원 앞 비렁뱅이를 못 본 척 지나친다. 그들 중 입심이나 말발(빨)이 특출하게 쌘 자가 정권의 국사 (國士)로 등장한다. 이런 승려들이 우글거리는 사원 (寺院)은 "그들을 공격하는 자는 당장에 더럽혀진다"는 이익 집단의, 오랜 세월 발효된 미사여구의 '달콤한 냄새가 풍기는 동굴' (4)이다. 이런 승려들은 이미 연민이나 동정이라는 작은 사상마저도 잃어버린 것이다. 그리고 실로 “이 목자(牧者: 승려)들까지도...양 떼에 속해 있(는) 것이다.” (5)
짜라투스트라는 말한다:
" 이 (교회) 지붕이 허물어지고 벽이 무너진 언저리에 무성한 잡초와 붉게 핀 양귀비로 해서 다시금 맑은 하늘이 펼쳐질 때 –그때 비로소 나는 한 번 (더) 내 마음을 신(神)께 돌리리라." (6)
"신은 죽었다"라고 선언한 니체마저도, 사원의 높은 탑과 벽이 낮아지고, 잡초 같은 인생과 멸시받는 창녀가 그 안에서 편안하게 숨 쉴 때, 그때 신이 아직 살아 있는지 다시 생각해 보겠다고 암시하는 것이다. 성직이 직업이 되었음을 마음 깊은 곳으로부터 부끄럽게 여기는 승려가 있어서, 그가 추위에 떠는 사원 앞 거지 노인에게 겉옷을 벗어주는 것을 목격한 냉담자는 운 좋은 자다. 왜냐하면 자신과 신에게 한번 더 화해의 기회가 주어졌기 때문이다.
(1)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정동호 역, p. 152
(2) '작은 사상'은 연민이나 동정을 가장 중요한 도덕적 덕목이라고 생각하는 것. ‘위대한 사랑’은 타인을 돕는 행위가 연민에서가 아니라 나 자신의 기쁨에서 시작하고 끝나는 경우의 마음을 말한다.
(3)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하였다, p. 107
(4)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하였다, p. 108
(5)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최승자 역, p. 132 "승려 (僧侶)가 최고의 유형(類型)으로서 통용되었던 시대에는, 모든 가치 있는 종류의 인간은 무가치로 되었다…. 승려가 최저의 유형으로서, …… 가장 거짓말쟁이며, 가장 무례한 종류의 인간으로서 통용하는 시대…… 그러한 시대가 온다.” 니체, 우상의 황혼, 45절, p. 441
(6)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하였다, p. 1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