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하였다> 읽기 35
본래 인생은 열락(悅樂)의 원천, 샘 (ein Born der Lust) 이어야 한다. 삶다운 삶이란 그야말로 매일매일이 가슴을 뛰게 하는 생명력과 환희가 넘치는 나날이어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속중 (俗衆: 잡것 das Gesindel) 들 때문에 삶은 더 이상 열락의 샘이 아니고, 악취 나는 더러운 진창이 되었다고 짜라투스트라는 말한다. (1) 속중, 혹은 잡것들이란 천민 (賤民), 지배하려고 날뛰는 자들, 흥정하고 거래에 능한 자들, 학자연 (學者然)하는 자들, 권력에 맹종하는 자들의 총칭이다.
그러나 누구든 조금씩은 천하고, 날뛰고, 흥정하고, 거래하고, 권력을 지향하고, 학자연하지 않고는 생존할 수 없는 이 시대에, 누가 누구를 속중, 잡것이라고 폄훼하겠는가? 우리는 유감스럽게도 이런 시대에 살고 있다. 우리는 누구나 다소는__하지만 다소 (多少)의 차이가 무슨 큰 의미가 있겠는가!__ 속중, 잡것인 것이다. 또 아직 속중은 아니더래도 어쨌든 속중으로부터 멀리 떨어져서는 고립되어 살 수 없는 것이다. 열락의 샘은 철들면서부터는 신기루에 불과하다.
그런데 놀랍게도 짜라투스트라는 자기만큼은 속중으로부터 떨어져 살 수 있는 열락의 샘을 찾았다고 기뻐한다.
" 열락 (悅樂)의 샘을, 오오, 나는 발견하였던 것이다. …… 여기에 차디찬 샘과 행복한 적막(寂寞)이 있다. …… 너무도 드높고, 너무도 험준하여 일체의 더러운 무리들과 그 갈증은 가까이 올 수 없다 ……강렬한 바람과 같이, 그들(속중)을 초월하여 살아가자. 독수리의 이웃사람, 눈(雪)의 이웃사람, 또 태양의 이웃사람 -- 우리들 강렬한 바람은 이같이 산다. " (2)
여기서 짜라투스트라가 말하는 열락의 샘이란 '드높고 험준한' 장소적인 의미만이 아니라 '속중을 초월한' 정신의 월등함도 의미한다.
속중의 무리에 속하지 않는 대부분의 사람들, 속중의 곁에 머물러야 하지만 내심으로는 속중과 잡것들을 경멸하는 사람들은 아마 짜라투스트라처럼 산중의 고적한 장소를 찾지는 못할 것이다. 그리고 사유(思惟)의 지고한 경지에도 이르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마음 한 구석을 맑고 서늘한 정서에 언제든 내어줄 준비만 되어 있다면 어떨까? 아마 그렇다면 속중의 무리 옆에서 살지라도 자신의 인생에 소박한 '열락의 샘'을 지닐 수는 있지 않을까! 물론 쉽지 않은 일이다.
(1) 니체,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하였다, p. 113f.
(2)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하였다, pp. 115-1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