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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채한리 Chae Hanlee Mar 02. 2024

'숭고한 자'가 숭고함을 버릴 때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하였다> 읽기 47

숭고한 자’가 숭고함을 버릴 때 



‘숭고하고 고고하고 고매하다'는 자의식 혹은 남들이 그에게 부여하는 '숭고한 자'라는 명예로운 타이틀에 묶여 정체된 자는 더 이상 자기 삶의 발전을 위해 애쓰지 않는다. 일단 ‘숭고한 자’라는 타이틀을 거머쥐면, 그는 이제부터는 쟁취하려는 모든 노력을 경멸하고, 쟁취하려는 자를 오히려 질투한다.  즉, ‘저울추와 저울대와 계량자를 둘러싼 싸움’ (1) __우위를 다투는 모든 치열한 경쟁__에 뛰어드는 일을 경멸하고 경쟁에 과감히 뛰어드는 사람들을 질투하는 자가 되어버린다. 


삶이란 니체가 생각하기에 지속적인 경쟁과 싸움 외에 아무것도 아니다. 그리고 이런 경쟁과 싸움에서 벗어나 안정된 고지에서 살아가려는 사람은 어리석고 불행하다. 삶이란 힘차게 움직여 전진하는 것이고, 제자리에 머무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사람은 최소한 ‘어제의 나’에 대항해서라도 싸워야 하는 존재다.


“싸움 (비교, 경쟁) 없이 살아가기를 비는 일체의 생존자는 불행한 것이다.”(2)


한편, 니체의 ‘숭고한 자’ 비판은 심미적인 비판이기도 하다.  생, 삶의 본질은 그 역동성에 있고, 인생이 아름다운 것이라는 의식은 삶의 역동성을 꿰뚫어 볼 때 생기는 의식이다. "이제는 다 성취했다"라는 생각에서 비롯되는, 모든 경쟁과 투쟁으로부터 초연하게 안전지대에 머물려는 소위 ‘숭고한 자’의 의도 자체가 생의 본질에 반하는 태도이기 때문에, 그런 사람은, 이미 아무리 많은 것을 성취한 사람이라고 해도, 결국은 비겁하고 추하다는 것이다. 


‘숭고한 자’가 경쟁과 투쟁에 대해 비겁해질 때 그는 어쩔 수 없이 질투하는 자가 되고, 경멸하는 자가 되고, 두려워하는 자가 되며, 추한 자가 되어버린다.  그러나 만일 그가 이 ‘숭고함’이라는 스스로를 묶어둔 말뚝과 스스로를 제한시킨 감옥에 염증과 혐오감을 느끼고, 말뚝을 뽑아버린 후 다시 박차 오르고, 감옥으로부터 뛰어나가려고 한다면, 바로 그 순간부터 그의 인간다운 아름다움이 생기를 찾게 된다. 


"이 숭고한 자가 자기의 숭고함에 싫증을 느꼈을 때, 그때에야 비로소 그의 미(美)는 솟아오를 것이다." (3)


오이디푸스가 신탁의 불길한 예언을 두려워하여 자신의 (양)부모를 떠나기보다 (이렇게 떠났기 때문에 그는 친부를 죽이고 친모와 결혼하게 된다), 그냥 머물러 닥쳐오는 일들을 헤쳐 갔으면 어땠을까? 또 애초에 오이디푸스의 친부모가 신탁에도 불구하고 아들을 버리지 않았으면 어땠을까?  비극은 예언에서 시작한 것이 아니라, 예언과의 싸움을 회피했을 때 시작했다. 그러나 오이디푸스가 자신의 과오를 깨닫고 운명과 다시 싸움을 시작하는 순간, 비록 장님이 되는 등 처절한 일들이 마구 닥쳐오지만, 오이디푸스적인 삶의 실체적인 아름다움이 ‘솟아오르는’것이다.


(1)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최승자 옮김, p. 158

(2)  니체,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하였다, p. 135:

(3)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하였다, p. 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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