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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채한리 Chae Hanlee Mar 16. 2024

정신의 참회(懺悔)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하였다> 읽기 51 

시인 (詩人)은 이렇게 노래한다:


"풀 위의 적막한 산 허리에 누워 귀를 기울이면...... 

자연은 우리에게 마음을 터놓고 

그 비밀을 속삭인다."  


그러나 니체는 이러한 시인의 노래를 애매하고 모호하다고 비웃는다. (1) 

특히 불멸하는 것이나 정신적인 것에 대한 시인의 영감(靈感)은 '비유이며 궤변'(2)에 불과한데도 불구하고, 우리가 시인의 이런 거짓말에 빠져드는 이유는 육체적인 것, 신체적인 것의 의심할 수 없는 확실성에 대해 무지하기 때문이라고 지적한다: 


"신체를 보다 제대로 알게 된 다음부터, 내게 정신이라는 것은 그저 정신처럼 보이는 것에 지나지 않게 되었다." (3) 


그런데, 내 생각을 말하자면 이렇다. 나이를 먹어감에 따라 점점 더 확실하게 나의 벗으로 여겨지는 두 친구가 있다.  바로 나의 몸과 나의 정신이다.  (뭐, 정신을 마음이나 영혼이라고 해도 좋다.)  그리고 늙는다는 것은 젊어서 정신이 차지했던 의식 (意識)의 자리를 몸이 자꾸 주장 (claim) 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물론, 사람마다 그 반대의 경우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육체 (신체, 몸)만큼 허망한 것이 또 있을까?  내가 아직 죽어본 적이 없어 내 체험을 말할 수는 없지만, 가까운 이가 유명을 달리해서 그 신체의 사후처리과정을 지켜본 적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결국은 자신의 몸도 그렇게 '처리'되리라는 것을 알게 된다.  그럴 때 우리는 만일 정신이나 영혼마저 없다면 생명이란 한 줌의 재에 불과함을 뼈저리게 느끼며, 인간의 정신만큼은 절대로 허망한 것이 아니어야 한다는 신념을 갖게 된다.  이 신념이 단지 맹목적인 고집에 불과한 것일까? 


그런데 니체는 말한다: 


"나는 이 정신에 지쳐버렸다. 그리고 나는 이 정신이 자기 자신에게 지쳐버릴 때가 다가오는 것을 본다.  이미 나는 시인들이 변한 것을, 그리하여 자기 자신에게 시선을 돌리는 것을 보았다. 나는 정신의 참회자들이 나타나는 것을 보았다.  그 정신의 참회자들을 시인들로부터 자라나 온 것이다. "  (4) 


니체는 정신의 참회가 육체를 무시한 것에 대한 참회라고 말하는 것 같다.  그러나 나는 정신의 참회는 다른 것이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맞다. 정신은 참회해야 한다.  감상적인 영감 이상의 것으로 성장해야 한다. 그러나 그것은 육체에 대한 미안감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어야 한다.  오히려 정신이 확실하게 자신의 실체를 밝히지 못한 점, 자신이 육체처럼 죽음과 함께 '처리'되는, 그렇게 허망한 것이 아님을 설득하지 못하고 있는 점, 생명 본연에 속하는 의식(意識)에서 그 자리를 육체에게 점점 더 빼앗기고 있는 점에 대하여 참회해야 한다. 





(1)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하였다, p. 147

(2)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정동호 옮김, p. 218

(3)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정동호 옮김, p. 216

(4)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최승자 옮김, p. 171  

이 마지막 문장들을 두고 니체가 시인의 역할을 낙관한 것이라고 판단하는 것도 가능하다.  니체는 다른 곳에서 시인의 역할에 대해 긍정적이다. "삶의 형성에 소비되지 않는 풍족한 시적인 힘이 지금도 현대의 사람들 사이에 존재한다면...... 현대의 묘사라든가 과거의 소생이나 응축을 위해서가 아니라, 미래를 위한 길잡이가 되기 위해 바쳐져야 할 것이다."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II, 제1장 여러 가지 의견과 잠언, p. 3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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