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문난 잔치의 메인디시가 곤혹일 줄이야>
어느덧 지겹도록 많이 읽히는 텍스트가 있다. '한국 영화가 위기이다.' 과거에 비해 눈에 띄게 줄어든 관객 동원수와 수입원, 그리고 OTT의 등장과 폭등한 티켓값으로 인해 더이상 관객들이 극장으로 향하지 않는다는 것이 이 위기론에 불을 지핀다. 확실히 과거 사람들로 꽉 채워지던 극장은 어느새 몇몇 자리를 듬성듬성 채우는 사람들로만 동작하고 있다. 지겹도록 많이 본 텍스트이지만, 결코 부정할 수 없는 명제이기도 하다.
그러나 흔히들 말하는 '영화애호가'(시네필이라 칭하진 않겠다. 그보다는 라이트한 관객을 지칭하고자 다른 표현을 쓴다.)들의 입에서는 공통된 이야기가 나온다. '영화가 재미가 없다.' 쓰라리지만 옳은 이야기이다. 당장 2025년에 극장 개봉한 한국 영화들의 목록을 살펴보자. <좀비딸>이나 <어쩔수가없다> 등의 영화가 나온 것은 사실이지만, <검은수녀들>이나 <보스>와 같은 영화들이 나란히 목록에 이름을 올린다. 특히 <보스>의 경우, 추석 연휴 특수를 노린 영화라 하지만 지나치게 올드한 조폭 코미디에 남성기 타격에 집착하는 구시대적이고 천박한 코미디로 일관하는 영화였다는 점이 한국의 관객들의 뇌리에 남았을 것이다.
이렇게 바라보자. 어떤 사람이 큰 돈을 들여 연회를 연다. 사람들을 모아두고 긴히 할 얘기가 있다며 연단 위에 오른다. 사람들의 이목이 집중되는 순간 그는, 한 시간 반이라는 긴 시간동안 자신이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읊는다. 그런데 내용이 '부모님 말씀을 잘 들읍시다' 정도의 수준이다. 자연히 따라오는 단어는 단 하나, '곤혹'이다. 더군다나 연설자는 이 연회를 통해 자신의 가치를 증명하고자 하며 이 자리에서 사람들이 자신을 알아주지 않으면 인생이 끝나노라고 읍소한다. 참으로 난처한 상황이다.
분명 중대한 사항을 발표하겠다며 연단에 선 연설자에게 주어지는 법적 책무는 없다. 그는 자신이 하고픈 말을 쏟아내면 될 일이다. 그러나 마찬가지로 뒤이어 쏟아지는 연설자에 대한 평판을 내리는 것은 전적으로 관객의 자유이다. 연회에 투입된 거액의 비용, 인력 자원과 참여자들의 시간이라는 자원까지 합쳐진다면 연설자의 그 허술한 공개적 넋두리는 취향의 영역에 머물 수 없다. 이제 다소 늦었지만 본격적으로 영화 이야기로 들어가보고자 한다. 주제로 삼은 영화, <전지적 독자 시점> 이야기를 말이다.
서울의 한 회사에 다니는 지방대 출신 비정규직 근로자 김독자는 한 소설의 열렬한 구독자이다. 그는 소설의 조회수가 점차 줄어감에도 꾸준히 소설을 읽는 유일한 독자이다. 소설이 완결이 나자 그는 작가에게 메일을 보낸다. 자신은 작가의 소설을 열심히 읽은 독자이며, 힘든 순간에도 소설을 통해 위로를 받았다는 내용이다. 그러나 메일의 후반부에 들어서자 그는 소설을 향해 혹평을 날린다. 결말부에 모두가 죽고 주인공 유중혁만이 살아남는 결말을 통해 작가가 무엇을 말하고자 한 것이냐며 비판한다. 그리고 '작가님, 이 소설은 최악입니다.'라는 말로 메일을 마무리하여 전송한다.
영화가 <전지적 독자 시점>이라는 동명의 웹소설을 원작으로 삼았다는 점을 생각한다면 참으로 의미심장한 장면이다. 사실상 도입부를 통해 제작자 측에서 IP를 가져다썼으나, 소설의 결을 따라가지 않겠다는 메시지로 읽힌다. 더불어, 소설은 자신들의 관점에서는 실패라고 혹평하는 듯하게까지 느껴진다. 다소 도발적이고 오만무례하게 읽힐 여지가 있는 시퀀스이다. 즉, 영화는 도입부를 통해 자신들은 IP만 빌려쓸 뿐 사실상 캐릭터와 내러티브의 독자적 노선을 걷겠노라는 선언을 한다. 그렇다면 과연 그들이 취한 '각색'은 발전적이고 또 진취적이었는가.
영화가 각색을 택하는 것은 이해할 수 있다. 원작 그대로의 내러티브를 중점으로 영화를 촬영한다는 것은 반드시 '굳이 이것을 영상화할 필요가 있었느냐'라는 비판점에 직면할 수 밖에 없다. 문제는 각색이라는 수단을 선택했음에도, 영화는 그 수단이 가지는 리스크를 감내할 가치가 있음을 증명하는 데에 실패했다. 비정규직 노동자의 소설 내 상황을 헤쳐나가는 내러티브를 통해 신뢰와 연대, 그리고 인간 자체의 가치를 우선시하는 이른바 '인본주의'라는 메시지는 그 리스크를 감내하기에는 너무나도 진부하다. 이는 분명 안전하고 무난하지만, 그 안전함은 모험의 결과가 아닌 선택의 회피에서 비롯한다.
결과적으로 영화는 도발이라는 위험수를 던지면서 안전한 길을 택한다는 모순을 겪는다. 이는 결국 팬과 일반 관객이라는 두 집단을 동시에 잃어버리는 결과를 낳는다. 팬들은 원작을 훼손했다며 크게 분노했고, 일반 관객은 사유할 가치를 느끼지 못 하는 킬링타임 무비라는 평만을 내린다. 600억 원이 넘는 거대 자본을 투입하며 만든 성대한 연회가 한 순간에 재롱잔치로 전락해버리는 순간이다. 그렇다면 묻게 된다. 과연 보편적 인본주의라는 '심심한' 이야기를 하기 위해 구태여 거대한 팬덤을 거느린 <전지적 독자 시점>이라는 웹소설을 호출할 필요가 있었을까. 그저 진부한 이야기를 덮어씌우고 기대기 위해 그 IP가 필요한 것은 아니었을까.
이러한 선택이 반복된다면 한국 영화계의 미래는 어두울 수밖에 없다. 유명 IP를 가져와 빵틀에 찍어내듯 자신들의 인본주의 메시지에 맞추어 내놓는 방식은 밝은 미래를 약속해주지 않는다. 지금 필요한 것은 <전지적 독자 시점>이라는 이름이 아니다. 관객이 무엇에 더 이상 설득되지 않는지를 직시하는 전지적 관객 시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