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인도에서 공항으로

강렬한 자극과 빠른 소모, 뉴욕의 양면성

by gogogigi

퇴사를 결정한 뒤 열심히 구인사이트를 새로고침하며 구직활동에 힘썼다. 하지만 준비되지 않았던 급작스러운 이직은 쉽지 않았고 퇴사날까지 나는 기쁘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초조해졌다. 그러던 찰나에 발리에서 느꼈던 행복함이 떠올랐고, 자연스럽게 또다시 비행기 예약 사이트를 조회하고 있었다.

그러다 우연히 발견한 뉴욕행 비행기. 뉴욕행 비행기 티켓이 생각보다 괜찮은 가격이었고, 이건 신의 계시라고 느꼈다! 퇴사 후 뉴욕 여행이라니, 너무 로맨틱하잖아?

내가 이때 아니면 언제 다시 뉴욕을 가보겠어라는 자기합리화를 마친 뒤, 나는 바로 티켓을 결제해 버렸다. 비행기는 금요일 퇴사 후 바로 다음 주 월요일! 퇴사 후 이런저런 잡생각을 할 틈도 없이 나는 나를 세계 최고의 도시 뉴욕에 던져놓아 회사에 겪었던 지옥 같은 일 생각을 하나도 하지 않게 만들고 싶었나 보다.


이렇게 뉴욕 여행은 일사천리로 진행되었고 나는 뉴욕행 비행기를 탔다. 근데 희한하게 생각보다 설레거나 기쁘지 않았고, 덤덤하게 “아, 뉴욕으로 가는구나”라는 마음으로 비행기를 탔다. 뉴욕에 도착하니 이미 밤늦은 시간이었고, 더 이상의 고정 수입이 없는 퇴사자인 나는 예산 이슈로 인해 호스텔에서 묵게 되었다. 호스텔은 생각보다 괜찮았고, 맨해튼 중심에 위치해 있어 이동도 편리했다. 그렇게 맨해튼 곳곳을 돌아다니며 유명 관광지에서 사진도 찍고, 맛있는 것도 많이 먹고, 많이 걸었다. 다만 맨해튼에서는 하루 종일 울려대는 사이렌 소리와 경적, 그리고 빽빽한 인파에 금세 지쳐갔고, 시차적응 실패 탓에 피로도는 점점 더 올라갔다.


맨해튼의 경적과 인파에 지친 몸을 이끌고 루스벨트 아일랜드를 방문했을 때, 조용하지만 아름다운 맨해튼 건물들을 볼 수 있어서 행복했다. 한여름이었지만 한국만큼 습하지 않아 그늘 밑에선 선선하게 쉴 수 있었고, 햇빛에 반사되어 찰랑거리는 이스트강의 윤슬은 너무 아름다웠다. 섬 위에서 바라본 맨해튼은, 바로 그 복잡한 도시의 소음 속에 내가 있었음을 잠시 잊게 해 줬다. 멀리서 보니 빽빽한 빌딩 숲도 하나의 풍경이 되었고, 고층 건물 유리창마다 반짝이는 햇빛은 거대한 미술 작품처럼 느껴졌다. 바람이 불 때마다 강물 위로 부서지는 파문과, 드문드문 지나가는 케이블카 소리가 묘하게 조화를 이루며 내 마음을 차분하게 가라앉혔다. 도심 한가운데 있으면서도 섬이라는 지리적 특수성 덕분에, 그곳은 마치 ‘뉴욕 속의 작은 피난처’ 같았다. 잠깐이지만, 그곳에서 나는 뉴욕이라는 도시와 화해할 수 있었다. 시끄럽고 과한 도시의 에너지가 아닌, 조용하고 묵직하게 흐르는 강과 햇살을 품은 뉴욕. 그리고 그 순간의 뉴욕은, 낯선 여행자를 따뜻하게 받아들이는 듯했다.


며칠 뒤, 나는 센트럴파크를 찾았다. 영화 속에서 수없이 본 풍경이 눈앞에 펼쳐지니 묘한 기분이 들었다. 뉴요커들처럼 잔디밭에 앉아 책을 읽고, 강아지를 산책시키는 사람들을 보면서 ‘아, 진짜 내가 뉴욕에 와 있구나’ 실감했다. 하지만 동시에 어딘가 이방인 같은 외로움도 스며들었다.


브로드웨이 거리를 걸을 때는 잠시 흥분이 되었다. 반짝이는 네온사인과 배우들의 사진이 가득한 극장 앞에서, 마침내 나는 공연 티켓을 손에 쥐었다. 선택한 작품은 위대한 개츠비.

무대 위 배우들의 연기는 그야말로 압도적이었다. 노래와 춤, 그리고 대사 하나하나가 관객을 끌어당겼다. 특히 개츠비의 독백 장면은 숨소리조차 아까울 정도로 집중하게 만들었고, 나도 모르게 가슴이 먹먹해졌다. 평소엔 공연에 쉽게 감동하지 않는 나인데도, 그 순간만큼은 마음이 크게 흔들렸다. 무대와 조명, 배우들의 열정이 만들어낸 에너지가 객석을 가득 채우는 걸 온몸으로 느낄 수 있었다. 브로드웨이는 단순히 화려한 간판이 늘어선 거리가 아니었다. 배우들이 무대 위에서 쏟아낸 땀과 호흡, 그리고 그 에너지를 함께 나눈 관객들의 환호가 오래도록 잔상으로 남았다.


저녁에는 타임스퀘어로 향했다. 거대한 전광판과 사람들의 함성 속에서, 나는 잠시 “무인도”였던 한국에서의 나를 잊었다. 하지만 그 소란스러움이 오래 이어지니, 곧 머리가 어지러워졌다. 관광지의 화려함은 잠깐의 흥분을 주지만, 오래 머물 자리는 아닌 듯했다.


이곳저곳을 다니며 깨달았다. 뉴욕은 ‘꿈의 도시’라 불리지만, 나에게는 “강렬한 자극과 빠른 소모”가 동시에 찾아오는 공간이었다.


그래서 나는 생각했다. 조금 더 여유롭고, 나다운 속도로 숨 쉴 수 있는 곳이 필요하다고.

그렇게 다음 행선지는 자연스럽게 정해졌다.


브루클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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