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욕받이였습니다

by 앤희베르



드디어 터졌다.

진상 고객을 여러 번 마주하면서 언제부터인가 고객의 목소리가 그냥 들리는 게 아니라,

내 귀를 때리는 느낌이 들기 시작했다.


물론 나도아주 재벌집 손녀처럼 귀하게 자란 건 아니지만

나도 누군가의 소중한 딸이다.

우리 부모님의 귀한 자식이란 말이다.


그런 내가, 남에게 이렇게 심한 말을 들어도 되는 걸까?

이게 정말 괜찮은 일일까?


어느 날 받았던 한 통의 전화는 아직도 잊히지 않는다.

“네네, 00 고객센터 00입니다.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그랬더니 돌아온 말.


“네가 도와주긴 뭘 도와줘. 내가 너네 회사 거를 이렇게 오래 써줬는데,

도대체 너네가 나한테 해준 게 뭐가 있니?”


“아, 네 고객님. 기분 상하신 부분이라도 있으시다면—”


“니까짓 게 날 도와줄 수 있어?? 넌 그냥 거기 앉아 있는 욕받이일 뿐이야.”


그 말이 가슴을 푹 찔렀다.


욕받이.......


그 단어는 그날 하루 종일, 아니 몇 날 며칠을 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그때 느꼈다.


고객들은 자신의 스트레스를 그저 상담사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내게 풀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 시절엔 상담사를 보호하는 시스템도 없었다.

상담사가 고객에게 할 수 있는 말은 단 하나뿐이었다.

“죄송합니다, 고객님.”


진심이어도, 진심이 아니어도, 그 말밖에는 할 수 없었다.

그렇게 매일매일, 누군가의 감정을 받아내는 하루하루가 반복됐다.


아침에 눈을 뜨는 게 싫었다. 회사를 가야 한다는 생각만으로도숨이 막히고, 마음이 무거웠다.


나는 그렇게, 한마디 말도 제대로 할 수 없는 상담사로 조금씩, 무너지고 있었다.

매일매일 고객에게 시달리면서 이런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원래 사회생활이 이렇게 더럽고 치사한 거야?"

"나만 이런 건가?"

"아니면 모두가 참는 걸까?"


가끔 친구들과 만나서 이런저런 얘기를 하곤 했다.

그 당시 내 친구들은 대부분 대학생 신분이었다.


괜히 그 친구들이 부러워지는 시기도 있었다.

"나도 대학교 중퇴 안 했으면과 모임도 가고, 엠티도 가고, 캠퍼스 걷다가 햇살 받으면서 커피도 마셨겠지?"

그런 생각들이 내 안에서 자꾸 자라났다.

그리고 점점 회사 가는 게 싫어졌다.


그러던 어느 날. 출근해서 일하고 있는데, 갑자기 이런 생각이 들었다.

"도망치고 싶다."


진짜, 당장, 지금, 이 순간.

아무 말도 없이 여기서 벗어나고 싶었다.


‘실장님, 저 오늘까지만 할게요’그 한마디가 왜 그렇게 어려웠을까.

나는 원래 그런 아이였다. 늘 용기가 부족하고, 말 한마디 꺼내는 것도 조심스러워하던 나였다.


결국, 나는 화장실을 간다고 하고 내 짐을 몰래 챙겨서 그 회사를 도망치듯 나왔다.

정말 말 그대로,‘도망’이었다.


누구에게 인수인계도 하지 않았고 퇴사 처리도 미리 알리지 않았다.

그렇게 무책임하게 시작된 나의 첫 직장은, 무책임하게 끝났다.

이전 01화나는 조금 모자란 채로 살아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