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울 속에 갇힌 40대 주부, 한 권의 노트가 건넨 작은 기적
나는 40대 중반, 중학생과 고등학생 아이 한 명씩을 둔 평범한 주부 정아다.
우리 집은 항상 조용하다. 아이들은 학교에서 돌아오면 저녁밥만 먹는 둥 마는 둥 하고 각자 방으로 들어가 문을 닫는다. 신랑은 잦은 회식으로 늘 늦는다. 결국 저녁 식사는 나와 아이 둘, 셋이서만 먹는다.
나도 아이들에게 묻지 않는다.
“오늘은 어땠니?”
“무슨 고민이라도 있니?”
이런 말은 오래전에 멈췄다. 처음부터 이렇게 살진 않았다. 평범하게 자라준 아이들은 때로 투정을 부리기도 하고, 사랑을 원하기도 했다. 그런데 내가 자꾸 밀어냈다. 그 결과, 이제 아이들은 아무것도 원하지 않는 눈빛으로 나를 바라본다. 나는 심한 우울증과 싸우고 있는, 마음이 고장 난 주부다.
언제부터 이 어둠이 나를 덮쳤는지 모른다.
큰 사건이 있었던 것도 아니다.
그냥 서서히, 우울증이라는 그림자가 내 일상을 점령했다.
때로는 그 어둠이 완전히 나를 덮쳐 하루 종일 침대에 누워 있을 때도 있었고,“절대 너에게 지지 않으리라” 결심하며 달린 날도 있었다. 하지만 항상 지는 건 나였다. 아무것도 할 수 없었고, 그저 그 어둠에 몸을 맡겼다.
이젠 고치려는 의지도 사라졌다. 하루하루가 무기력하다.
신랑도 처음엔 병원에 같이 가주고 도와줬지만, 변하지 않는 나를 보며 포기한 듯하다.
기댈 사람은 없다. 이 아픔을 더는 말할 수도 없다.
외롭다. 힘들다. 우울하다.
삶의 의욕이 없다.
오늘은 비가 내린다.
비가 오면 이 어둠이 씻겨 내려갈까 싶어, 우산을 들고 밖으로 걸었다.
계속 걷고 또 걸었다. 그러다 우연히, 빛이 새어 나오는 환한 문구점을 보았다.
간판에 적혀 있었다. 희망을 파는 문구점 앤희베르‘이런 곳이 있었나?’
정말 나는 아무것도 보지 않고 살았구나, 싶었다.
언제 생긴 걸까? 그냥 지나치려 했지만, 그 앞에 서보니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희망을 판다… 나에게도 팔 수 있을까?
궁금해졌다. 그렇게 나는, 그곳에 발을 디뎠다.
“어서 오세요. 우산이 참 예쁘네요.”
내가 문을 열고 들어서자, 카운터에 있던 여인이 부드럽게 웃었다.
나는 대답 대신 우산을 털며 주변을 둘러봤다.
아늑한 조명, 잔잔한 음악, 종이와 잉크 냄새. 어딘지 모르게 오래된 친구 집에 온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녀는 카운터를 나와 내 쪽으로 다가왔다.
“오늘은 어떤 마음을 가지고 오셨나요?”
그녀의 질문에 나는 눈을 깜빡였다.
마음?
여긴 무슨 마음을 들고 와야 하는 곳일까. 대답 대신, 한동안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심리 상담도 오래 받았지만, 큰 변화는 없었다.
그런 나에게… 이곳에서 뭘 기대한다고 들어온 걸까. 아직도 내 안에 무슨 기대가 남아 있기는 한 걸까.
내 생각이 깊어져 갈 즈음, 그녀 아마 이곳의 주인일 것 같은 여자가 잔잔한 목소리로 다시 말을 걸었다.
“괜찮아요. 오늘은 그냥… 아무 마음 없이 오셔도 돼요. 그런 날도 있잖아요. 마음이 없는 날.”
그 말이 내 안에서 울렸다. 마음을 잃어버린 지 오래된 나에게, 마음이 없어도 괜찮다고 말해주는 사람은 처음이었다.
“… 요즘 많이 힘드셨죠?
아무도 몰라주는 싸움을 혼자 오래 하고 계신 것 같아요.
우울이라는 건 나약함이 아니라, 너무 오래 버틴 사람에게 오는 신호예요.
마치 오래 달린 나무가 더 이상 비바람을 견디기 힘들 때, 스스로 가지를 내려놓는 것처럼요.”
나는 시선을 떨궜다. 그녀는 서두르지 않고, 천천히 말을 이어갔다.
“너무 변하려고 애쓰지 않으셔도 돼요. 정아 씨 속도로, 한 걸음 한 걸음이면 충분해요. 매일 같은 시간에 햇빛을 잠깐이라도 쬐는 것, 따뜻한 차를 내려 마시는 것, 혹은 하루에 한 줄이라도 좋은 문장을 적어보는 것…그 작은 것들이 쌓이면 마음이 아주 조금씩 움직이기 시작해요.”
나는 조심스럽게 고개를 들었다.
그녀는 부드럽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오늘은 그냥, 여기까지 걸어오신 것만으로 충분히 잘하셨어요. 정아 씨, 이곳에 오신 것도 변화의 시작이에요.조금씩, 아주 조금씩… 마음이 다시 숨 쉬도록 해드릴게요. 여기는요, 잃어버린 마음을 잠시 맡겨두는 곳이에요. 지금은 무겁고 아파서 들고 다니기 힘들잖아요. 그러니까 제가 대신 꼭 안아두고 있을게요. 언젠가, 정아 씨가 다시 웃을 수 있는 날이 오면 그 마음을 깨끗하게 닦아서 그대로 돌려드릴 거예요. 그날이 오기 전까지는… 제가 대신 지켜드릴게요.”
그녀의 목소리는 오래 굳어 있던 내 마음을 살짝 열어젖혔다.
그리고 그 틈으로 아주 희미한 빛이 스며드는 것을, 나는 느낄 수 있었다.
내 눈가에 뜨겁게 고인 눈물이 떨어졌다.
그녀는 놀란 기색 없이, 조용히 카운터에서 보라색 노트를 꺼내 내 손에 올려놓았다.
“이건 ‘숨 노트’ 예요. 하루에 단 한 줄만 쓰면 돼요. 그 한 줄이, 당신을 내일로 데려갈 거예요.”
나는 숨 노트를 소중히 안고 집으로 돌아왔다. 손끝에 닿는 보라색 표지의 감촉이, 그녀가 건네준 따뜻한 마음을 그대로 전해주는 것 같았다. 집에 도착하자, 나는 깊게 숨을 들이쉬었다. 그리고 마음속으로 다짐했다.
오늘, 꼭 한 줄을 적겠다. 그 한 줄이 작고 사소한 것일지라도, 이제 나는 조금은 따뜻한 마음을 안고, 다시 살아갈 힘을 느낄 수 있었다.
숨 노트
✔️ 오늘 하루 살아낸 것만으로도 충분히 대단해요.
✔️ 마음을 잃어버린 날도, 그저 견딘 것만으로 의미가 있어요.
✔️ 조금씩, 아주 천천히 걸어도 돼요. 당신의 속도가 바로 힘이에요.
✔️지금은 힘들어도, 언젠가 다시 웃을 날이 올 거예요. 그때까지 마음을 지켜주세요.
✔️ 완벽하지 않아도 괜찮아요. 지금 이 순간 있는 그대로 충분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