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날을 홀로 보내는 취준생 이야기
설 연휴를 홀로 보냈다. 내가 집을 지키는 동안 가족들은 문경에서 온천을 하고 속초로 동해를 보러 간다고 했다. 연휴 첫날부터 일과를 마치고 돌아와 빈집의 문을 여니 외로웠다. 스무 살이 지난지 햇수로 7년 차다. 여느 직장에 가든 7-8년 차면 대리를 지나 과장을 단다. 어느새 과장급 성인이자 7년 차 성인이 되었다. 과장급 어른이 되면 혼자 있다고 해방감을 느끼진 않는다.
지금 이 처지는 <나 홀로 집에> 한국판이 따로 없다. 취준한다고 민족 대명절에 집에 남은 주인공. 한국 정서에 맞게 완벽히 로컬라이징 된 리메이크작일 것이다. 원작은 크리스마스가 배경이었지만 재연 작은 설날을 배경으로 하는 거지. 주인공 특성도 완전 교차해보면 어떨까.
개구쟁이 10살 남자아이 대신,
개_ _ _ 27살 여자 어른이 주인공.
20대 후반 무직 여성이 주인공인 한국판 <나 홀로 집에>. 언더바 세 개는 그냥 개구쟁이와 글자폭 맞추려고 넣었다. 댕댕이처럼 귀엽다는 뜻은 아니다. 축 늘어진 채 주인만 기다리는 풀 죽은 강아지면 몰라도.
각설하고, 외로운 건 외로운 건데 어쨌든 혼자 남았으니 혼자여서 할 수 있는 일을 하고 싶었다. 원작의 케빈도 가족이 떠나자마자 본인만의 일탈의 시간을 즐겼다. 아이스크림과 피자를 폭식하고 취침시간을 어기고, 성인영화를 본다. 그럼 한국판 스물일곱 살의 일탈은 무엇이어야 할까. 나도 팝콘 들고 침대에서 뛸 수는 없잖아. 1) 비일상과 2) 마음에 켕기는 일의 교집합이 무엇이 있을까. 일단 쿠팡 이츠 쿠폰으로 공차를 두 잔 시켜보긴 했다. 삭은 몸을 가진 스물일곱은 액상과당 한 잔도 고민스럽거든. 그런 내가 공차를 / 라지 사이즈로 / 두 잔이나 사치스럽게 떵개했으니 일탈이 아닌가.
배달을 시킨 뒤엔 동생 침대에 누워 비활성화했던 인스타그램을 활성화했다. 모르겠다. 솔직히 취업 전까진 소셜미디어를 통한 소셜링은 꺼림직하다. 그렇지만 오늘은 일탈하겠다는 마음을 먹은 터, 누군가 맞팔을 하자길래 고민하다 설치를 하고 말았다. 두 번째 마음에 켕기는 일을 해냈다.
일탈의 시작은 순조로웠지만 그 순조로움이 끝이었다. 요 며칠 잠을 설친 탓에 피로가 밀려왔고, 잠시 눈을 붙인다는 것이 그만 불을 켠 채 10시쯤 잠들어버렸다. 이게 일탈이라면 참으로 시시한 일탈이었다. 겨우 공차 두 잔과 인스타그램 재설치가 내 반항의 전부였다니. 그럼에도 이 정도의 헛짓만으로도 내면의 아슬한 쾌와 불쾌 사이 줄타기를 하는 것만 같았다. 썩 내키지도, 유익하지도 않은 일을 한 것만으로도 내 일상은 충분히 균열될 수 있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유치한 선택들이 줄 수 있는 즐거움이란 고작 이 정도였다. 문제는 내가 제대로 된 일탈을 하지 못해서가 아니었다. 소중한 여가시간을 이렇게 의미 없이 흘려보냈다는 것, 그것이 가장 컸다. 침대에 웅크려 인스타그램이나 켜고 스무디나 홀짝이다 보니 밤은 순식간에 녹아버렸다.찜찜함은 먹다 남은 밀크티 컵 바닥의 타피오카처럼 끈적하게 남아있었다. 정확히 여섯 시간의 저품질 수면 뒤 눈을 뜬 새벽 4시. 오래간만에 부은 눈과 얼굴을 문지르며 나는 설을 맞았다.
의도했든 아니든 케빈처럼 혼자 집에 남겨진 신세였다. 과식과 설잠 탓에 얼굴은 퉁퉁 부어 있었다. 무심코 거실 창밖을 내다보니 눈이 내리고 있었다. 아니, 내려앉고 있었다. 공중에 흩날리던 눈송이들이 이제 땅에 닿아 고요를 쌓는 중이었다. 어제의 찜찜함을 덮어주려는 듯 콘크리트 바닥까지 하얀 층이 덮여있었다. 유리창에 손가락을 대니 차가움이 스며들었다.
혀 밑에서 꿈틀거리는 단어들이 있었다. 혀끝에 맴도는 말들, 이야기하고 싶은 무언가들. 하지만 정작 입 밖으로 나온 건 잠긴 목소리로 뱉는 텁텁한 한숨뿐이었다. 새해 첫 아침을 혼자 맞이하는 이 기분을 뭐라 표현해야 할까. '외로움'은 너무 평범했고, '고독'은 과장된 듯했다. 미완의 설(設)이라면 어울릴 법했다.
어제 남겨둔 밀크티를 냉장고에서 꺼냈다. 차가워진 액상이 플라스틱 컵 안에서 움직일 때마다 타피오카들이 느리게 가라앉았다. 어제의 라지 사이즈 두 잔은 분명 위장보다 먼저 자존심을 채우려는 시도였다. 그래도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새벽을 맞는 것보다는 낫지 않았을까. 적어도 눈이 내린 새벽의 공허함보다는 견딜만했다.
한껏 당분 과다 상태가 된 채 책상에 앉았다. 밀크티 한 잔에 아침 기상 습관 두 개를 내던진 나의 대담함에 살짝 들떴다. 작은 습관과 큰 습관의 차이다. 아침에 일어나 유산균을 챙겨 먹고 스트레칭을 하는 것은 포기할 수 있어도, 책상에 앉아 오늘 치 계획을 세우는 것은 타협할 수 없는 습관이었다. 취업을 위한 삶에서 가장 즐거운 일을 '취업 공부'로 만들기 위해 나름대로 애썼다. 인스타그램이나 유튜브 대신, 책상에 앉아 책을 펴고 지식을 '인지'하는 것. 여기서 말하는 공부는 정보의 '입력'이 아니라 '인식'에 가까웠다. 부담 없이 나열된 정보들을 눈에 바르듯이, 생각하지 않고 인지하기만 했다. 투입량만 늘리는 학습에 의구심을 품지 않기로 했다. 그리고 그것이 가장 즐거워졌다. 생각하지 않는 즐거움. 고민하지 않는 즐거움을 만들었다.
하지만 공복에 마신 공차가 문제였다. 밀크티의 당분은 나의 두뇌 지형에 균열을 내기 시작했다. 엄격한 생활습관으로 간신히 눌러왔던 호기심의 잔가지가 아침부터 뻗치기 시작했다. 우연히 읽은 언어학 지문 하나가 나의 두뇌 지형에 물길을 내고, 사고의 유속을 빠르게 만들었다. 눈에 발라봤자 흡수되지도 않을 공부는 도로 넣고, 노트를 펼쳐 필사를 시작했다. 기껏 메워두었던 생각의 구덩이들이 싱크홀처럼 다시금 존재감을 드러냈다. 이 생각도 하고 싶고 저 생각도 하고 싶다. 여긴 더 파고들고 싶고 저긴 더 깊어지고 싶다.
세 시간 동안 필사와 작문에 몰두했다. 살아있음을 느꼈다. 숨 쉬고 있었다. 내가 숨 쉬고 있구나. 삼 일 치 수면 부족의 여독 따위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힘들지 않았다. 오히려 행복하고 개운했다. 주입식 공부의 즐거움이 얼마나 얄팍했는지 새삼 깨달았다. 나는 이게 좋았다. 정말 좋았다.
다 마신 플라스틱 컵을 만지작거렸다. 좋지만 멈춰야 한다는 걸 안다. 하지만 이미 사유의 급류에 휩쓸렸다. 완결 짓지 못한 메모들을 고치고 싶다. 그러면서도 다시 마음이 켕긴다. 케빈은 집을 지켰지만 나는 무엇을 지키고 있는 걸까. 글쓰기마저 나에겐 일탈이자 반항이 되었구나. 책상 위에는 읽다 만 책과 필기 노트, 그리고 밀크티를 담던 빈 플라스틱 컵만이 남았다. 창밖의 눈은 그저 고요히 내려앉은 채로 침묵한다.
평소라면 이 시간에 도서관에 있었겠지. 인간이 만든 가장 인공적인 숲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단연 도서관일 것이다. 서고를 등지고 창가에 앉아 있으면 묵은 종이 냄새가 피톤치드처럼 상쾌하게 피어오른다. 피톤치드처럼 상쾌한 책의 향기, 거기에 묵직한 우디향이 더해진다. (어쨌든 나무긴 하니까?) 눅눅해도 좋다. 오래된 책은 우려낸 티백 같아서 공기 중에 찻잎 향이 배어난다. 난 매일같이 15평짜리 찻잔에 앉아있다.
xx 도서관 2층 종합자료실, 나는 늘 4층 열람실이 아닌 2층의 서고 창가 자리를 고른다. 빼곡한 책의 숲 사이에서 우러난 찻잎 향을 들이마신다. 이곳은 내가 만든 두 번째 숲이다. 4층의 아우토반은 모닝이 발을 딛기엔 너무 치열하다. 나의 속도에 집중할 수 있는 2층이 좋았다. 콘크리트 바닥 하나를 사이에 두고, 위층에서는 현실을 위한 질주를, 아래층에서는 내면의 성장을 쌓아간다. 책 표지들을 보면 존엄한 노년을 위한 마음가짐을 담은 책, 풋사과, 토마토, 청포도류의 청춘을 예찬하는 제목의 소설이 보이기도 한다. 그리고 나는 수험서를 양손에 들고 두 층을 오가는 이상한 독자다.
도서관은 나에게 숨통을 터주는 공간이면서도, 동시에 현실을 상기시키는 공간이다. 며칠 전 영주를 만난 것도 이곳이었다. 영주는 열세 살 때 처음으로 내가 동경했던 동갑내기 친구다. 테일러 스위프트와 포켓몬을 좋아하고, 자기만의 그림체로 다이어리를 꾸미던 괴짜였다. 그리고 그런 괴짜의 개성이 좋아서 나는 하루 종일 영주 옆에 붙어 다니며 테일러 스위프트 노래를 듣고, 그림을 그렸다. 지금 내 앞에 앉은 지친 낯빛의 여성은 1년째 도서관에서 취업 준비를 하고 있다고 했다. 내가 동경하던 그의 요철들이 잘 보이지 않았다. 우리는 모두 각자의 숲을 잃어가고 있는 걸까. 아니면 새로운 숲을 만들어가고 있는 걸까. 나는 매일같이 이 인공림 속에서 깊이 숨을 들이마신다. 나의 요철을 지키려면 지치지 않아야 한다고 되뇌며 숨을 삼킨다.
평일 저녁마다 해외 문학을 읽는 루틴을 만들었다. 낮 시간의 취준 공부로 달아오른 머리를 식히는 냉각수쯤으로 생각하며 시작했지만, 냉각수 삼아 고른 책들이라도 결코 만만치 않았다. 정신승리를 위로하기 위한 20분의 루틴. 사실 나도 알고있어. 억지로 만든 즐거움이 얼마나 작위적인지. 나의 욕구와 대립되는 짓을 하려니 문학이 필요했다. 비비꼬는 말들, 의도와 감정을 이해하기 위해 몇 문장이고 몇 문단이고 읽어야만 하는 귀찮은 글들.
1월에는 모 작가의 책을 네 권 완독했다. 고른 이유는 단순했다. 책이 얇았고, 최근 본 영화 속 주인공이 좋아하는 작가였기 때문이다. 작품이 영화에서 어떻게 활용되었는지, 감독이 그 작가를 통해 어떤 메시지를 전하고 싶었는지가 궁금했다. 의도와 감정을 온전히 이해하기 위해 몇 번이고 같은 문장을 되풀이해야 했다. 그러나 번역된 문장은 언제나 상하기 직전의 생선 같았다. 원문의 말맛을 온전히 살리지 못한 채 절반의 영양가만을 전달했다. 고작 몇 천 자 분량의 수필을 적는 나도 문장, 한 문장에 많은 공을 들인다. 문장 구조와 단어 선택 하나까지도 모두 의도된 장치임을 안다. 그러니 작가의 섬세한 의도들이 다른 언어로 건너가면서 희미해지는 게 안타까웠다.
반면 말하기는 쉽고 가벼웠다. 혀끝에서 맴도는 생각들을 툭툭 뱉어내면 그만이었다. 하지만 그 말들은 흩어지기 쉬웠고, 닿지 못하는 곳이 많았다. 그래서 나는 글을 쓰기 시작했다. 글은 말보다 느리고 무거웠지만, 그만큼 더 깊고 오래 남았다. 언어는 표상과 같다. 어떤 메시지를 전하든 결국 내가 하고 싶은 말 하나를 정확히 전달하지 못하고 가장 그 메시지와 가까운 말을 전할 수밖에 없다. 핵심을 맴돌 수밖에 없는 이 불확실성, 그리고 이 불확실성이 만드는 다양성과 무한함이 매료시킨다.
일상을 지탱하기 힘든 날이면 어김없이 안정제에 의지한다. 그런 날, 안정제를 먹지 않으면 모든 사물에 생각이 들끓고 고민이 깊어진다. 며칠 전, 개봉한 영화 하나를 보았다. 아주 못난 영화는 아니었지만 기대에 못 미치는 것을 빌미로 글을 쓰기 시작했다. 내가 관찰한 것은 사실이었고 단순히 감정 섞인 비난이 아니라는 생각을 하면서도 멈출 수 없었다. 만 자쯤 쓰고 나니 후련했다. 더 이상 글을 쓰고 싶지 않았다. 이 폭발적인 글쓰기가 과연 진정한 창작일까?
영주의 말이 떠올랐다. "하루키는 매일 같은 시간에 같은 양의 글을 쓴대. 그런데 사강은 감정에 솔직하게 몰입해서 써. 어느 쪽이 진짜 창작일까?" 그때는 답하지 못했다. 하루키처럼 절제된 언어로 감정의 깊이를 드러내는 것도, 사강처럼 자유분방하게 써 내려가는 것도 둘 다 내게는 낯선 방식이었다.
예술은 '나'를 배제한 훈련의 결과일까, 아니면 '나'를 극대화한 자기 고백일까. 나는 창작이 훈련인지, 자유인지, 아니면 그 사이 어딘가에 있는 것인지 아직 알지 못한다. 하루키의 정원처럼 고요히 흐를지, 사강의 강물처럼 거칠게 굽이칠지. 어쩌면 1만 자의 글처럼 터져 나올지도 모른다. 다만, 안정제로 감정을 누르고 글쓰기로 터뜨리는 이 반복적인 행위가 나만의 생태계를 만들어가고 있다는 것을 안다. 영주의 요철이 무뎌진 것처럼, 나의 요철도 무뎌지진 않아야할텐데.
팔짱을 낀 채 거실 창밖을 바라본다. 여전히 세상은 하얗다. 오늘 영하 5도, 다음 주는 영하 11도라는데. 녹기는 하는 걸까. 봄이 오긴 할까. 부질없는 생각들이 머릿속을 맴돈다. 겨울 다음 봄이 오고, 봄 다음 여름이 오는 건 변하지 않는 진리지. 알면서도 불안한 마음은 어쩔 수 없다.
지금은 그저 할 일을 할 뿐이다. 방어적으로 꼈던 팔짱을 풀고 몸을 돌려 방으로 들어간다. 책상 위에는 읽다 만 책과 필기 노트, 그리고 텅 빈 밀크티 컵이 놓여있다. 눈에 보이는 것들, 손에 잡히는 것들에 집중해야 한다. 안정제를 삼키고 다시 책상 앞에 앉는다. 눈을 감고 숨을 고른다. 다시 눈을 뜨고 책을 편다. 활자들이 눈앞에 어지럽게 펼쳐진다. 눈에 지식을 바른다. 당분간만이야. 정말로. 눈이 녹으면 그때 다시 글을 쓸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