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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살. 나의 기둥이 무너졌다.

그리운, 내 인생 최고의 아버지

by 쿠요

대학생활은 즐거웠다.


당장 갈 길을 잃었다는 불안감은 있었으나 그게 딱히 현재를 살아가는 데에 문제가 되진 않았다. 아니 어쩌면 "나는 우주와 관련된 경험을 쌓아야 해."라는 생각에서 벗어나고 나니 오히려 해보고 싶은 것들을 다양하게 했다. KAIST 안에 ICISTS (아이시스츠) 라는 과학기술과 사회의 융합이라는 학술포럼동아리에도 들어가서 정말 즐겁게 나의 1-2학년 생활을 보냈다. 그때는 동아리와 학교 생활에 열심인 내가 스스로 자랑스럽기도 했다.


나는 대전 그것도 카이스트의 거의 근처 동네에서 어릴 적부터 살아왔지만 대학생 때 친구들은 대부분 기숙사 생활을 한다는 명목으로 집에서 나와 기숙사 생활을 하기 시작했다. 독립이라니! 너무 멋지지 않은가! 그러니 얼마나 즐거웠을까. 부모님을 사랑하긴 했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하루하루 대학 친구들과 함께 다양한 경험들로 가득 차 있던 나의 일상에서 부모님에게 뭔가 이상한 변화를 감지하기에... 나는 너무 어렸었다.


아마도 그런 나를 잘 아시는 부모님은 본인들의 변화를 말하고 싶지 않았으리라.


일주일에 한 번. 그것도 너무 많다고 생각해서 거의 한 달에 한 번. 집으로 가는 시간이 점점 뜸해졌다. 항상 언제 오니? 먹고 싶은 거 없니?라고 먼저 물어보셨던 부모님이 뭔가 조금씩 다르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저 집에 가려고요."

"아 이번 주...? 이번 주는 엄마 아빠도 어디 여행 가서 집에 없을 텐데. 그냥 학교에 있으렴."


눈치 없던 딸은 엄마 아빠만 여행 간다며 투덜거렸다. 내가 없어도 두 분이 너무 잘 지내잖아?라는 묘한 안도감과 함께 괜히 툴툴거리는 딸을 보며 엄마는... 그냥 웃었다.


그러던 어느 날. 왠지 모르겠는데.. 아무도 집에 없다는 걸 알지만 집에 가고 싶었다.

바로 그날, 텅 빈 집을 둘러보던 내 눈에 약이 한가득 들어있는 봉지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 서울아산병원


뭔가 모를 불안함이 온몸을 엄습했다.

바로 엄마에게 전화했다. 받지 않았다.

바로 아빠에게 전화했다. 받지 않았다.

그래서 나와 7살 차이가 나는 큰오빠에게 전화했다.

전화를 받았다.


"오빠. 나 집에 왔는데, 뭔가 이상해. 약봉지에... 약이 너무 많아."

"아... 음... 효선아. 아버지가 좀 아프셔."


그렇게 알게 된 아버지의 병.

아버지는 기스트암이라는 희귀성암 말기였다.





무슨 말을 할 수 있었을까.

어떻게 그 감정들을 내가 받아들일 수 있었을까.


그렇게 나는 그냥 고장이 났다.


빈 집에서 엉엉 울었다.

내가 할 수 있는 거라곤 어릴 적부터 배웠던 기도밖에 없었다. 달리 무엇을 할 수 있었겠는가.

'하나님, 예수님, 우리 아빠는 어떻게 되는 거예요?

아빠는 천국에 갈 것 같은데, 저는 천국에 갈 수 있어요? 그럼 제가 천국에 못 가면 앞으로 아빠는 영영 못 만나는 거예요? 아빠가 천국에 간다면, 저도 꼭 나중에 천국에 가고 싶어요. 아빠를 못 만나는 건 너무 아파요. 하나님, 진짜 거기 계세요? 그럼 제발 저도 천국에 갈 수 있다고 알려주세요. 나 너무 무서워요.'


침묵.

내가 믿는 신, 하나님은 그날 나에게 바로 대답하지는 않으셨다.

그래서 더 무서웠다.


두려움.

괴로움.

슬픔.

분노.

좌절.


이 모든 것이 한데 뒤엉켜 나는 한참을 씨름했고 결국 울다 지쳐 잠에 들었다. 눈을 떴을 때 꿈이길 바랐던 간절한 내 손 위에는 여전히 약봉지가 있었다. 그리고 어머니에게 문자가 와 있었다.


'집에 가서 이야기하자.'




공부를 하는 법은 배웠는데 슬퍼하는 법은 배우지 못했다.

부모님에게 투정 부리는 법은 알았는데 부모님을 위로하는 법은 몰랐다.

부모님에게 귀여운 딸은 될 수 있었는데 부모님의 곁을 지키는 딸이 되는 법은 몰랐다.


아무도 나에게 슬픔을 다스리는 법을 가르쳐 주지 않았고

아무도 나에게 이런 상황에 어떻게 좋은 딸이 될 수 있는지를 알려주지 않았다.


아버지는 나에게 약한 모습을 보이고 싶어 하지 않았다.

나는 좋아질 거야 라는 굳은 믿음 속에서 끊임없이 병과 싸우고 계신 아버지에게 내가 어떤 위로를 할 수 있을까.


지금은... 안다.

아버지는 환자이기 이전에 사람이고 싶었다는 걸.

너무 아프지만, 환자로 불쌍히 보이고 싶지 않았다는 걸.

곁에서 안쓰러워하고 불쌍히 여기는 시선을 더 감당하기 힘드셨다는 걸.

그래서 자신도 아픈 몸이지만 딸에게 조언을 해주고 싶고

그래서 자신도 가족을 힘들게 하는 게 하는 존재가 아닌 존중받는 존재이고 싶었다는 걸... 이제는 안다.


어쩔 줄 몰라서 나는 아버지 앞에서 잘 울지 못했다.


... 차라리 다 울걸.

좋은 추억들을 아버지와 나누고

아버지가 미래의 나에게 해주고 싶은 말들을 귀담아듣고 그러다 같이 울고 그러면서 또 일상을 살아갈걸.

사진도 찍고 영상도 남기고 시간을 보낼걸.


아빠는 좋아질 거야. 건강해질 거야.라는 말만 용기를 준답시고 말했던 나는 슬픔이란 감정을 다스릴 줄 몰라서 계속 회피했던 건지도 모르겠다.




2010년 9월 9일.

병원에 있던 어머니에게서 연락이 왔다.

"오늘 와야 할 것 같아."

그렇게 온 식구가 다 모였다.


"마지막 인사를 하자."

어머니가 말했다.


아직 의식이 있었던 아버지를 마주하며 인사를 했다.


"아빠, 사랑해요."


그냥 고개를 끄덕거리시던 아버지는 힘겹게 앉아있던 몸을 침대에 누이시자 바로 하늘나라로 가셨다.


1년의 투병 끝에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언제까지고 나를 당연하게 지지해 주리라 생각했던 하나의 기둥이 무너졌다.


누군가의 죽음이 진짜로 일어나는 일이라는 걸 그날 나는 정면으로 마주했다.


그리고.. 나의 방황이 시작되었다.





* epilogue

아버지는 참 강한 분이었다. 하고 싶은 게 있으셨지만, 가족에 대한 책임의 무게 때문에 결국 해야 하는 것들을 선택하셨다. 그리고 평생을 하고 싶은 일을 하지 못한 것에 대해 아파하셨다. 그런 아버지를 봐왔기에, 훗날 결혼하면 남편이 하고 싶은 것을 지지하겠다 다짐했다. 남편의 눈에 빛을 심어주는 일이 있다면, 나는 그 일을 지지하겠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차마 보지 못했던 아버지의 일기를 몇 년이 지나서 펼쳐보았다. 차마 가족들에게 다 하지 못한 말이 적혀있는 아버지의 일기에는, 우리에게 다 나을 거야 건강해질 거야라고 했던 그 말과는 다르게 삶을 정리하고 계셨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많이 아프셨구나. 그러나 많이 강하셨구나.

그러니 이제는 아버지의 약함과 아픔에 아파하기보다, 그런 아버지를 자랑스러워하리라.


15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아버지가 어릴 적 보여주셨던 삶의 태도와 깊이는 내 안에 계속 살아 숨 쉬고 있으니, 적어도 그는 나에게 가장 훌륭한 아버지였다.



* 첨부파일. 아버지의 일기. 딸의 편지.


아버지의 일기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4년 뒤, 어렵게 일기를 펼쳤다.

그리고 아버지에게 편지를 적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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