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말로 그렇게 살아갈 수 있을까?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나서 나의 감정은 고장이 났던 것 같다. 슬프긴 했지만 무엇에 정확히 슬퍼야 하는지 모르겠고, 그립긴 했지만 딱히 못 살아갈 정도는 아니었다. 그래서 누군가 괜찮니? 라고 물어보는 그 질문에 "괜찮아" 라고 말하며 더 웃으며 아무렇지 않게 다녔던 것 같다.
지금 생각해보면 20살의 나는 괜찮지 않았다. 내 감정과 마주하는 게 무서웠을 수도 있고, 내가 힘들어 하는 모습을 타인에게 보이는 것이 부끄러웠을 수도 있겠다. 혹은 힘들다 라고 말했을 때 타인에게서 오는 어쩔 줄 몰라하는 당혹감이 나로 더 눈치보게 했을지도 모르고. 그 외에도 이유는 수없이 많았겠지만 아무튼 분명한 건 나는 무언가 고장나 있었다.
사람들과 있다가 혼자 있게 되면 끝없이 허무해졌다. 나와 가장 가까운 사람의 죽음을 지켜봤던 나는 '사는 것은 무엇인가.' 에 대해 고민할 수밖에 없었다. 어차피 죽는다면... 나는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하는가? 무엇을 하고 싶은지도 모르겠는데.. 결국 사람들도 다 내 곁을 떠날텐데, 그냥 이렇게 하루 하루 그냥 살다가 죽는게 삶이라면 왜 살아야 하는가. 돈도, 지위도, 관계도 쌓아가야 할 목적을 잃어버리니 더이상 아무런 흥미가 느껴지지 않았다.
이전에는 그냥 스쳐갔을 질문들이, 아버지의 죽음을 마주하고 나서 더이상 피할 수가 없었다. 그걸 외면하기에는 내가 너무 간절했다.
"오빠. 요즘 나는 왜 살아야 하는지 잘 ... 모르겠어."
아버지의 투병생활 중, 큰오빠가 다른 사람이 되었다. 내가 알던 오빠는 대학시절 참 방황하던 사람이었는데 대학원 생활 중에 교회를 다시 다니기 시작하면서 다시 만나게 된 오빠의 얼굴에는 편안함이 가득했다.
어릴 때부터 교회를 다녔지만, 나에게 기독교 신앙은 그냥 일요일에 교회 가는 것. 그 이상 그 이하의 어떤 의미도 아니었다. 교회에 가면 그냥 사람들한테 상처받는 거 아닌가? 그래도 어렸을 때부터 습관처럼 다녔으니, 말그대로 그냥 종교생활. 나의 스케줄 중 하루 교회를 가서 설교 내내 졸다가 투두리스트를 체크하고 집에 돌아오는 것 뿐이었다. 그런 내가 오빠에게 질문을 하기 시작했다.
"오빠. 진짜 기독교가 뭔지 잘 모르겠어. 신앙이 뭐야? 나는 솔직히... 아무 것도 느껴지지 않아."
그 때 큰오빠는 나를 기독교 서점으로 데리고 갔고, 올바른 신앙 서적을 찾는 법을 가르쳐 주고 책만 수북히 사다주고 읽으라고 했다.
'그래. 나는 그냥 교회를 다니고 있지만, 진짜 신앙이 뭔지 제대로 공부해보자.'
계속 알기를 거부했던 내가 마음을 먹기 시작했다. 본격적으로 질문하기 시작했다. 나는, 해결을 해야만 했다.
그리고 나는 그 책들에서 마틴로이드 존스 목사님을 만났다.
마틴로이드 존스 목사님은 20세기 최고의 설교자 라고 불렸던 영국의 설교자이다. 이 분의 저서들을 찾아 보기 시작하면서 기독교의 가장 핵심 교리인 십자가 복음에 대해 찬찬히 살펴보기 시작했다. 이 때 나는 정말로 간절했다. 내 삶에 기준들이 세워지지 않으면 내가 너무 무너질 것 같았다.
'진짜?'
'정말로?'
질문 반, 기대 반으로 책을 봤던 몇 개월. 조금씩 가랑비에 옷 젖듯 스며들기 시작했다. 신앙지식이 들어오기 시작하자 체계가 잡히기 시작했고, 내가 가지고 있는 존재에 대한 고민들이, 삶에 대한 질문들이 사실은 막연한 게 아니라 답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들이 있다는 생각에 차츰 차츰 내 안에 허무함이 사라지기 시작했다. 읽히지 않던 성경이 읽히기 시작했고, 설교가 들리기 시작했다. 그게 너무 신기했다.
그러던 어느날. 큰오빠가 주최하는 기독교 컨퍼런스에 참여하게 되었다.
- 기독교 개혁주의 청년 컨퍼런스
대체 어떤 사람들이 여기에 있을까.
다들 나처럼 삶에 대해 고민하는 사람들일까?
진짜로 신앙에 대해서 진지한 사람들일까?
그냥 교회만 다니는 척 하는 신앙 말고,, 진짜 살아내기 위해 애쓰는 사람들이 있을까?
온갖 궁금증을 안고 컨퍼런스에 참가한 둘 째날.
가만히 앉아서 설교를 듣다가 ... 기도 시간에 엉엉 울었다.
'아, 예수님이 세상을 사랑해서 십자가에 돌아가셨다고 했는데... 그거 그냥 너무 멀게만 느껴졌는데... 그거 나 때문이었구나. 나는 참 연약하고, 참으로 최인인데 이런 나를 위해 돌아가셨구나.'
값 없이 한 없이 부어지는 은혜.
그 사랑이 너무 감격스러워서 나는 계속 울었다.
비로서, 자유해 지는 느낌이었다.
웨스턴민스터 대요리문답에 가장 처음에 나오는 질문이 있다.
"사람의 첫째 되고 가장 높은 목적은 무엇입니까?"
이 질문에 대답이 이렇게 적혀있다.
"사람의 첫째 되고 가장 높은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함과 영원토록 하나님을 온전히 즐거워함 이다."
내 삶의 목적이... 부귀영화가 아니라, 결국 하나님께 맡겨져 있다는 것, 그 사실이 나를 정말 평안하게 만들었고 내 기준이 성경 위에 있다는 것은 나를 뿌리깊게 만들었다.
그러면서 동시에 두려웠다. 그런데 정말 가능할까? 세상 속에서 기독교인들이 끊임없이 욕을 먹는 이유는 결국 말과 삶이 다르기 때문인데, 나 정말 그렇게 살아갈 수 있을까? 성경은 그렇게 살아갈 수 있다고 말을 하는데 세상은 그렇게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무서웠다.
그러나 이것 하나는 분명했다.
나는 기독교라는 반석에 나의 신앙을 세웠고
그 신앙이 나의 삶의 의미가 되었으며
세상의 풍파를 버텨낼 힘을 주고 있다는 것.
그리고 완벽하지 않은 나는...
올바르게 살아가고 있다! 가 아닌
올바르게 살아가고 싶어서 여전히 씨름하고 있는 연약한 존재라는 걸.
나에게 신앙이 생겼던 이 사건이, 앞으로 펼쳐질 내 인생의 반석이자 가장 큰 터닝포인트였다.
... 그리고 22살 그렇게 큰오빠의 권유로 참여하게 되었던 기독교 개혁주의 청년 컨퍼런스에서 나는 지금의 남편을 처음 만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