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연락하지 말아요.
2012년 대학교 4학년의 여름. 내 나이 22살이었다.
그는 내가 그 해 참가했던 기독교 개혁주의 청년 수련회의 조장이었다.
처음 만났던 그는 다부진 체격에 꽤 진지한 사람이었지만 상냥한 말투와 상대방을 배려하는 자세가 멋있는 사람이었다. 그때 우리 조는 우리의 신앙에 대해 진지하게 이야기를 하는 사람들이 모여있었고 2박 3일 동안 낮의 일정이 끝나면 다 같이 모여서 밤새 그날의 주제에 대해 토론을 했다.
한 번도 이렇게 토론을 해 본 적이 없었다. 교회에 대해, 신앙에 대해, 살아가는 것에 대해 진지하게 질문을 던지고 답을 해나가는 친구들이라니! 세상에는 내 생각보다 더 멋있는 사람들이 많았구나를 느꼈던 이때 밤새도록 토론하는 즐거움을 처음으로 느꼈다.
그리고 토론의 중심이 되어 다른 조원들의 고민을 듣고 논리 정연하게 답을 안내해 주는 그를 보며 나는 호감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호감을 느꼈을 뿐, 나는 그 마음을 키우지 않기로 했다.
내 삶의 중심을 신앙으로 세워가기 시작한 무렵, 내가 가장 먼저 확립했던 것이 연애관이었다.
'아무 남자나 만나지 않겠다.'
어차피 연애의 끝은 결혼 아니면 헤어지는 것이라면, 애초에 결혼을 전제로 누군가와 교제를 시작하겠다.
그게 내가 했던 다짐이다.
단지 이성적인 끌림으로 누군가를 만난다는 건 찰나에 지나가는 감정인 걸 알았기에 나의 시간과 마음을 아무에게나 주고 싶지 않았다. 정말 내 인생의 가치를 진지하게 논할 수 있는 사람이어야 했고 신앙 안에서 대화를 깊이 있게 할 수 있는 사람이어야 했다. 내가 앞으로 평생을 살아가야 하는 사람이라면.. 적어도 그렇게 대화를 할 수 있는 사람과 연애를 시작하고 싶었다.
그러던 때에 그가 등장했다. 그런데 그는.... 목사가 되고 싶어서 신학대학원을 들어가기 위해 준비 중이던 목회자후보생이었다.
... 아, 미처 내가 정해놓은 결혼관에서 그건 예상하지 못했다.
그래서 나는 생각했다.
'참 좋은 사람이야. 그리고 이 수련회가 끝나면 그냥 좋은 인연이 되겠지. 멋진 친구가 생겼어!'
행복하게 수련회를 보내고 나는 다시 일상으로 돌아왔다. 2박 3일 짧은 만남이었지만 좋은 인연들을 만났다. 그러나 이 인연들이 다시 이어질 수 있을까? 그건 어찌 될지 모르는 일이었다. 멀리 사는 이 친구들을 통해 좋은 사람들이 많다는 사실을 안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그렇게 수련회가 끝나고 3일 뒤.
문자가 하나 왔다.
- 똑똑똑 :) 잘 지내고 있나요?
...? 똑똑똑이라니. 문자로 똑똑똑을 입력하는 사람을 처음 봤다. 피식 웃으며 답장했다.
- 안녕하세요 오빠:) 저는 잘 지내고 있어요. 잘 지내고 계세요?
그리고 노빠꾸의 그는 이렇게 말했다.
- 응, 잘 지내고 있어요. 혹시 다음 주에 제가 대전에 내려가면 잠시 만날 수 있을까요?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어요.
무슨 이야기인지 짐작을 갈 것 같았지만 돌다리도 두드려보기 전엔 모른다고 애써 생각하며 우리는 만날 날을 잡았다. 구리시에 살고 있던 그를 대전에 내려오게 하는 게 못내 미안해서 마침 서울 갈 일정도 있고 하니 서울에서 만나기로 했다.
그리고 우리는 서울 강남 한복판 커피빈에서 만났다.
저 멀리 창가에 그가 먼저 와서 앉아있었다.
창 밖을 바라보며 잔뜩 긴장한 모습.
인사를 하고 앞에 마주 앉았다. 조금 겉치레 같은 안부 인사가 짧고 오고 나서 그는 바로 본론부터 들어갔다.
"갑자기 당황스러울 수 있지만, 혹시 네가 어떻게 신앙을 갖게 되었는지 말해줄 수 있을까?"
....??
살짝 당황스러웠지만, 긴장해서 입술을 살짝 떨면서 말하는 그를 보며 자연스럽게 나의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그래, 오빠는 이런 사람이었지. 굉장히 솔직하게 이야기를 하지만 그게 진솔하다고 느껴지는 사람이었지. 겉치레로 포장하는 것에 서툰 사람이었지. 나의 이야기를 들으며 계속 긴장해서 손을 바들바들 떨고 있는 그를 보다 못해 말했다.
"오빠 왜 이렇게 떨어요? 혹시 몸이 안 좋아요?"
혹시나 싶어 말하지만 알아서 물어본 게 아니다. 나도 눈치가 꽤 없었어서 정말 추운가 싶어 물어본 거다. 한여름이었는데.
괜찮다고 말하고 끝까지 내 말을 들은 그는 잠깐 생각에 잠겼고, 우리는 일어나 근처로 밥을 먹으러 갔다.
돈가스가 나왔다.
'그래, 이제 먹고 가면 되겠구나.' 하고 돈가스를 이제 막 먹기 시작한 무렵, 그가 말했다.
"이미 알지도 모르겠지만... 사실 수련회에서 보고 나서 너에게 호감이 생겼어. 수련회가 끝나고 마음이 점점 더 커져서 나도 정리가 좀 필요했어. 그리고 아까 이야기하고 나는 정리가 된 것 같아. 나는 너와 만나보고 싶어."
...??????? 아니 이렇게 바로 이야기를 한다고?
그 뒤에 당황했던 나는 어떤 말을 했는지도 잘 기억이 안 난다. 다만 우리는 돈가스를 거의 먹지도 못하고 다 남긴 채 식당을 나서야 했다.
헤어지기 전에 그에게 말했다.
"저는... 잘 모르겠어요."
그리고 일주일 뒤, 그는 나에게 편지를 줬다.
우선은 조금 알아가 보자 라는 그의 제안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고 그때부터 그는 나에게 조금씩 연락을 하기 시작했다. 저녁때가 되면 그가 보내는 문자가 도착했다.
-똑똑똑:)
매번 조심스럽지만 꾸준히 자신의 마음을 표현해 오는 그를 보며 나는 혼란스럽기 시작했다.
괜찮을까?
그에 대한 호감이 있었지만 선뜻 용기가 나지 않았다. 이 사람과 결혼을 하게 되면 나는 결국 목회자가 아내가 될 텐데 나는 그렇게 살 자신이 없었다. 일단 만나고 생각해라고 말하기에 나는 끝이 보이는 연애는 하고 싶지 않았기에 더더욱 결정을 못했다. 그런 나의 이기적인 마음들도 그에게 다 말했지만 그는 그런 거로 흔들리지 않았다.
그렇게 2주일에 한 번 하던 연락은 일주일에 한 번, 3일에 한 번, 2일에 한 번이 되자 내 안에서 불안감이 엄습했다.
'이건 안 될 것 같아. 이러다가는 내 안에 결심이 서기 전에 정말 만나버릴 것 같아.'
때마침 그는 이제 곧 신학대학원에 들어가는 입시시험을 치러야 했다. 나에게 이미 마음을 줘버린 그가 지금 나와의 관계 때문에 혹여라도 흔들려서 자기에게 주어진 길을 제대로 가지 못할까 봐 그것도 불안했다.
그렇게 특단의 조치를 취했다.
- 우리 이제 연락하지 말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