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추일승 Aug 15. 2021

1999(4)

감독 동무!


북한팀에 항상 같이 따라다니던 한 사람이 나를 부른다. 그는 코칭 스탭도 심판도 아니었다.

평소 선수촌에서 경기장 연습장을 다닐 때 같이 셔틀버스로 타면서 낯도 익고 친해질 수도 있었지만 

말을 섞어도 수동적이어서 대화는 많이 못했다. 또 신분 자체가 서로가 군 조직이어서 그런지 나 역시 조심스러웠지만 궁금한 것도 많았다.


그러더니 대뜸 내게 뭔가를 준다.

워커맨이었다.

"이러면 서로가 좋지 않습니다."

나는 순간적으로 무슨 일인지 대충 짐작이 갔다.

알겠다 하고 나는 그것을 받아 들고 가방에 넣고 나중에 선수들에게 물어봤다

"자꾸 빌려 달라고 해서..."

그랬구나..

이 때는 SES  핑클  한참 인기가..



그런데 이곳 자그래브에서는 또 하나의 사건이 벌어진다.


"완전 난리가 났죠"

우리 대한민국의 동행 심판의 말이다.

오전 심판 배정을 받았는데 북한과 이탈리아의 경기였다

그런데 북한에서 이의 제기를 했다고 남한 심판이 보면 판정의 불리함이 있을 수 있다고..

어찌어찌해서  경기가 시작되었는데 

경기중 난투극이 벌어졌고 북한 선수한 명이 과격한 행동을 해서 경찰들이 출동하고 

경기가 중단되고 두 팀은 몰수경기가 되어 더 이상 경기를 치를 수가 없게 되었단다.


그 후 선수촌은 북한 선수단을 보는 시선이 곱지 않았다.

 우리는  태극 마크가 선명한 모자를 꼭 쓰고 다녔다.


우리는 운 좋게 조 2위로 4강에 올라갔다. 미국에 지긴 했지만 어쩔 수 없는 경기력이었다.

점점 우리 선수단의 응원이 농구 쪽으로 집중됐다. 배구 핸드볼은 결선리그에 못 가고 메달은 물 건너갔다.

이제는 거꾸로 구기종목의 마지막 보루가 되어 있는 상태가 되었다.




크로아티아엔 교민이 한 가족 살고 있었다. 태권도 사범 하는 분이었다. 이후엔 이웃 나라에서 응원을 오신 모습이 보인다 경기 후 선수들과 사진도 찍고 정말 고국이 그리웠나 보다.

경기전 애국가가 울릴 땐 애국가를 힘차게 불러 주신다.  목이 메는 소리도 들린다.

나 역시 가슴 한켠이 뭐가 울컥하는 느낌이 들었다.


이제는 4강이었다.  

크로아티아랑 결승 진출을 다투었지만 우리 상대는 아니었다. 크로아티아 랑 상대한 팀 중 가장 최소 점수차로 진 것으로 만족해야만 했다. 우리는 동메달을 걸고 3~4위전에 나가야 했다.

얄궂게 우리한테 져서 약이 바짝 오른 라트비아랑 다시 붙게 되었다.

이 대회는 대진 방식이 북한과 이탈리아의 몰수경기로 인해 하위리그 최상위 팀과 3~4위전을 하게 되었다.


아 라트비아..

독이 바짝 올라 있을 텐데..

우리는 이제 수비로 이 경기를 승부수를 띄웠다. 

이 전에는 지역방어였다면 이젠 세트 디펜스에서 대인방어로 과감하게 하지만 포스트는 트랩 수비를 (함정수비) 준비했다. 가끔 이어지는 점프 스윗치 디펜스에 라트비아는 당황하기도 했다.


그것은 모험 이기도 했다. 델 해리스의 전술서를 번역하던 중 이 수비의 매력에 빠져 실전에 하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한국서는 이 수비를 할 기회가 없었다. 실패해도 잃을게 별로 없었다.

선수들 역시 사기가 충천해 능동적으로 훈련에 임해줬다.


역시 거세게 처음부터 우리를 몰아붙였다.

하지만 우리 선수들은 이제 노련해졌다. 우리의 리듬을 기다렸다. 10점 미만 이면 따라갈 수 있었다.

공격 리바운드는 포기했다. 속공을 막는 게 더 유리했다. 그렇게 쉬운 실점을 주지 않았다.

드디어 후반  우리에게 기회가 왔다. 슛이 터져 준 것이다. 3점 세 개가 연이어 들어가자 상대는 당황했다.

수비를 바꾸고 김병철을 막기에 급급했다. 가끔 정재훈이 이상영이..

준비한 플레이를 선수들이 정말 잘해주었다.


그렇게 우리는 승리를 거머쥐었다. 우리 응원단이 코트로 뛰쳐나왔다.

부대장은 체면이고 뭐고 없이 펄쩍펄쩍 뛰고 저 멀리 관중석에서 우리를 응원해주신 분들이 울고 계신다.

스포츠는 이래서 감동을 만들어 내는가 보다....

나라의, 조국의 존재가 이런가 보다.



김병철은 베스트 5에  뽑히고 

같이 오신 김홍배 고문은 "남자농구가 무슨 대회라도 세계대회서 동메달은 딴 거는 처음이란다."

그리고 종합 순위서 북한을 이겼다.

우리는 오랜 시간 비행을 하고 김포공항에 내려 메달 종목은

부대까지 아무도 없는 올림픽대로를 카퍼레이드를 했다.


그리고 메달 못 딴 종목은 군기 교육, 우리는 휴가를 나갔다.

나는 바로 감독으로 승진을 했고 장관 표창을 받았다.


몇 달뒤  TV서 많이 보던 얼굴들이 보인다.

부산 아시안 게임 북한 선수단 중 남자 농구팀.. 두명만 빼고 다 크로아티아에 온 선수들이다.

코칭스탭 역시..

하지만  거 이상 하다... 왜들 나이가 한 4년씩 젊어졌지?


과거를 회상하며 새삼 그들이 그립다.

이제는 후진들 양성에  지도자들이다..

세월이 흐른 것을 실감하며 제2의 제3의  메달리스트를 키워주길  기대한다.


김병철 ..나와 오리온스에서 코치로

김희선.. 강원사대부고 코치

김광운.. 연락이 두절

김태진.. 명지대 감독

정재훈.. 한양대 감독

이상영.. 상무 코치

신 석.. 용산중 코치

지형근..개인사업

안종호.. 현대 모비스 근무

윤재한.. 개인사업

김정인.. 나이키 근무 

박재일..개인사업


역전의 용사들 건강하길..

작가의 이전글 2021 The basketball Tournament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