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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추일승 May 31. 2021

외국인 선수 이야기 2

두 선수와 계약을 마치고 근 한 달만에 귀국을 하였다.  당시 KBL에서는 비 시즌에 10개 구단이 모여 단합대회 성격의 체육대회를 했다.  이때 김 진감독이 "매너 없는 짓을 한다"라고 뭐라 한다. 이유를 들어보니 애런 맥기와 협상 중에 우리가 선수를 빼 갔단다.  영문을 모른 채 애런에게 연락하기도 뭐해서 합류할 8월만 기다렸다. 시간이 흘러 맥기에게 물어봤다. 어느 구단하고 또 협상을 했냐고.. 오리온 하고 협상 중에 좀 더 연봉을 더 준다는 구단에서 테스트를 했는데 계약을 안 한다고 했단다. 아마 공중에 뜬 KBL행을 에이전트가 우리 구단을 찾은 것 같았다.

나는 애런에게 그 구단을 알아냈다.


그 당시 한국은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는 에이전트나 선수가 많았다. 그래서 미국에 갈 때 이태원, 시청, 구단 체육관, 버스 이런 것들을 동영상으로 찍어 가지고 다니면서 보여줬다. 외국인이 많은 것을 안심시키고 체육관에 농구 열기 그리고 리무진 구단 버스가 어필할 수 있는 점들이었다. 올림픽 월드컵 등을 설명해도 모르는 사람들도 많았다. 

한 번은 이태리 1부 리그 팀 원정 경기를 따라갔다. 보고 싶은 선수 옆방에 방을 잡고 대화 기회를 엿보는데 그 방에 더블 침대에 두 명이 자는 것을 봤다.  절대 못 믿을 것이다. 유럽의 리그는 상위 몇 개 팀을 제외하면 그렇게 지원이 풍족한 구단이 별로 없다. KBL 구단의 지원이나 시스템은 상위에 속한다. 


또 우리 관광버스 같은 크기에 구단 버스는 서너 시간을 이동하면서 경기하는 것을 봤다. 애런은 이태리 리그서 급여를 못 받고 스페인으로 이적한 경험이 있어 그 부분이 매우 민감했다. 때문에 우리는 리그에서 급여를 보증한다는 점을 강조했다. 


아무튼 그런 애런이 첫 해 성적이 너무 좋았다. 리바운드왕은 물론 더블 더블은 기본으로 했고 하위권 팀이 바로 상위권으로 가면서 이상한 소문이 돌았다. 물론 김진 감독에게 그런 설명을 해줬지만 믿으려 하지 않았다. 


KTF에서 6년 동안 여섯 분의 단장을 모셨다. 새로 오신 단장님은 첫 이사회만 다녀오시면 우리 팀 애런 맥기가 연봉이 얼마냐고 물었다. 아니 구단의 예산을 집행하는 사무국장을 통하면 내역이 다 나와있는데... 


애런 맥기의 세 번째 시즌, 나는 전자랜드의 김성철을 영입하고 싶었다. 그쪽 박종천 코치에게 제안을 했다. 성철이를 주면 애런을 주겠다고.. 박종천 코치가 "야 애런이 얼마 짜린데 우리가 할 수 있겠냐" 그래서 그럼 계약서 명시된 돈을 나한테 주면 계약해서 트레이드시켜주겠다고 했다. 그렇게 어느새 애런은 비싼 선수가 되어 있었다.  


애런 맥기가 좋은 점은 승부 기질이다. 그는 아킬레스가 염증이 생겨 고생을 좀 했는데 그때마다 진통제 주사를 놔 달라고 해서 그것을 맞고 경기를 강행했다. 난 이제 까지 그런 선수를 못 봤다. 돈이 전부가 아닌 선수였다.


나는 애런을 통해 배운 게 있다. 실력도 중요하지만 승부욕도 선수 선발하는데 중요한 요인이라는 것을.. 


NBA 샌 안토니오의 포포비치감독 한 말이 떠오른다. 선수 스카우트는 경기 뛸 때 보다 벤치서 팀이 질 때 그의 모습을 관찰하라 그가 어떤 태도를 보이는지를.. 갑자기 전자랜드의 임준수가 떠오른다. 안 맞는 비유인가....


      맥기는 계약이 끝난 후에도 전지훈련에 와서 게임상대가 되 주었다. 옆에는 켄트 감독님


훈련을 마친 후 훈련평가.. 콧수염의 켄트 감독님 맨 왼쪽은 당시 켄트 감독님 팀 코치 제런 잭슨 그의 아들 제런 잭슨 주니어는 멤피스에서 많은 활약을 하고 있다.




방성윤이 D리그 있을 때 당시 감독을 했던 켄트 데이비슨이란 분이 있다. 그분이 어느 날 연락이 왔다. "코치 추 어마어마한 선수가 왔다. 너희 팀에 데려가면 좋을 것 같다." 시즌이 시작되고 한 달쯤 지나 서다.  방성윤 지명을 해서 보탬이 되려나 했는데 계약이 안되고 있던 차에 SK 김태환 감독님에게서 트레이드 제의가 왔다. 이래저래서 우리는 핵심적인 조상현 슈터를 데려왔다. 이제는 안정된 리바운더가 필요했다. 그러던 차에 미국에서 켄트 감독님이 연락을 해 온 것이다. 메일로는 엄청 거대한 선수고 백보드를 장악할 것이라고는 썼지만 궁금했다. 아마 D리그 1라운드 2순위로 지명되고 아직 시즌 전이었다.


우리는 시즌 중이라 코치들은 힘들고 구단 직원을 미국으로 출장 보내 훈련 동영상을 찍어 보내라 했다.  며칠 있다 직원이 전화를 했다. "감독님 인터넷이 느려 업로드 시간이 22시간 나옵니다". 그러면 LA에 가면 인터넷 카페가 있으니 비행기 환승도 할 겸 LA에서 보내라고 했다. 16시간 이란다. 그럼 느낌은?  "고릴라 같은 데요 뛰면 빠르기도 하던데요, 몸을 만져보니 살이 아니라 근육 이던데요".. 농구를 좋아하는 친구라 그 직원한테 마지막으로 묻는데 "잘할 것 같아?"  " 제 생각은요  모 아니면 도 같습니다."  그럼 사인 하구 같이 와요..


그는 나이젤 딕슨이라는 선수다. 켄트 영감님은 매년 미국 전지훈련을 가면 D리그 자신의 선수들 그리고 뽑고 싶은 선수들을 데리고 와서 우리랑 연습경기를 해 주었다. 그래서 KBL스타일을 잘 아는 분이라 믿음이 갔다. 그분의 마지막 추천 선수는 지난 시즌 DB서 뛴 얀테 메이튼 이다. 켄트 영감님의 제자가 조지아 대학 감독을 해서 은퇴한 스승을 모셔가서 스태프로 합류시켰다. 메이튼을 지켜본 그는 나한테 적극 추천을 했다. 덕분에 조지아 대학에 가서 엄청난 규모와 시설에 놀랬다. 코치 켄트, 그분은 내게 코치로서 자세를 알려주셨다. "코치는 선수를 지도할 때 에너지가 그대로 선수들에게 전달된다. 언제나 열정 있게 지도하라" 그리고 어떤 누구에게도 눈치 보지 말라, 자신만의 스타일을 만들라..!


                                            나이젤 딕슨 그는 몸무게부터 젤 수 없었다.



나이젤 딕슨은 리바운드 머신이었다. 165KG 체중에 KBL저울이 고장 나 그냥 불러주는 대로 체중을 145KG라고 썼지만 골 밑의 파워나 리바운드의 의지는 당해낼 선수가 없었다. 그 시즌에 한 5개 구단이 딕슨을 막으려 덩치 큰 선수로 교체를 했다. 우리 팀 황진원은 연습 중 손기락으로 가리키던 동작에 코뼈가 함몰됐다.  그가 합류한 이후 KTF는 성적이 수직 상승을 했고 우승의 기대감이 커 갔다. 그런데 정규리그 말미에 무릎인대가 파열이 돼 미국으로 돌아갔다. 속이 쓰렸다.


합류 첫날 신기성은 "감독님 아닌데요. 슛도 그렇고 앤 아닌 것 같아요"


딕슨의 과거가 하나씩 알려지자 KBL의 룰 이 바뀌었다. 경기 때 예비 골대를 준비하는 규정이 생겼다. 그는 대학 때 그리고 그리스 리그서 백 보드를 부순 경험이 있었다. 그는 수술 후 예전의 운동능력과 경기력이 살아나질 않았다. 너무 아쉬운 시즌이었다.



아테네 물방개 여사


과거 인터넷이 느리고 안되던 시절 선수들 정보의 핵심인 경기 테이프를 구하기 어려웠다. 에이젠트들은 하이라이트만 보여주고 계약을 채근했고 미국에서는 함부로 경기 때 비디오 촬영 금지했었고 유럽도 그랬었다. 특히 유럽은 리그가 많아 궁금한 선수들이 너무 많았다. 한 번은 최진수가 다니던 메릴랜드를 나온  테런스 모리스란 선수가 그리스 리그에서 뛴다는 것을 알았다. 담 시즌 이 선수를 무조건 뽑아야겠다고 생각해 어떻게든 경기 비디오를 구하고 싶었다. 나는 이 친구를 D리그서 보고 KBL에 딱 맞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매년 미국에 가면 이 친구에게 매달렸다. 그때마다 NBA를 노린다고 양해를 구했다. 포기할 때도 되겠다 싶어 유럽에서 경기력을 보고 싶었다.   그리스라..


 이때 그리스 교민들에게 부탁을 해보기로 하고 여행자들의 민박집을 검색하여 어느 집에다 부탁을 해봤다. 이런 팀의 농구 경기를 녹화해 보내오면 한 개 당 100불을 준다고 했다. 그리고 며칠 후 답글이 적혔고 통화를 했다. 아테네 민박집 중 물방개 여사라 하면 다 아니까 걱정 말고 돈을 보내란다. 그리고 열흘 후 어떤 여자분이 전화가 왔다. 물방개 여사 심부름으로 전할 게 있다면서  ㅎㅎ  하지만 모리스는 우리가 데려올 선수가 아니었다. 어느덧 유로리그급 선수가 되어 바르셀로나, CSKA 유럽의 명문팀에서 뛰는 정상급 선수가 되어 있었다. 씁쓸했지만 속으로 선수 보는 눈이 아직 괜찮아하고 위안을 삼았다.



                                   테런스 모리스 D리그에서 본 그는 내 맘에 쏙 들었다.


자유계약으로 접촉이 자유로운 점은 있지만 선수 보는 눈은 높아져만 갔다. 매년 새로운 선수가 쏟아져 나오고 전 세계로 리그를 경험한다. 우리의 스카우트 팀은 대학 졸업반부터 항상 이들을 세분화해서 기록 관찰을 해야만 한다. 이런 일이 즐거웠다. 그리고 유럽의  농구도 차츰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각 구단의 국제 업무나 코치 그리고 전력분석 팀은 일 년 열두 달 그들을 놓치지 않고 관찰하고 있다. 그 당시 함께 했던 강병수 김용식 코치 그리고 오경진 국제업무 홍창의 이런 친구들은 시즌이 끝나도 쉴 시간이 별로 없었다. 그들에게 항상 감사하고 고맙다는 말을 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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