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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더하기 Mar 18. 2022

두 번째 내 방이 생겼다


 기린이 그려진 벽지가 영 눈에 거슬린다. 거슬려서 자세히 보니 기린만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옆에 배가 뚱뚱한 오리가 기린을 쳐다보고 있는 벽지였다. 아이가 초등학생이던 13년 전에 이사 오면서 붙인 벽지를 이렇게 자세히 보는 건 처음이다. 내가 벽지에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아이가 개강을 하면서 방이 비어졌고, 글을 쓸 만한 공간이 필요하던 차에 내 방으로 찜하던 날부터다. 아동 틱 하기 짝이 없는 기린 벽지만 빼면 나이 50이 넘어 생긴 두 번째 나의 방은 책상과 의자, 아이가 간 노트북까지  모든 것이 마음에 들었다.


아이가 보던 책을 전부 빼 다른 책장에 넣고 그 책장에서 전에 읽었던 책들을 골라 책상 옆 책꽂이에 보기 좋게 진열? 하던 중, 기형도 시인의 '입속의 검은 잎'과 기형도 20주기  문집 '정거장에서의 추억' 책이 보였다. 고등학교 때 짝꿍에게서 생일 선물로 받았던  '입속의 검은 잎' 시집을 읽으면서 글은 아무나 쓰는 게 아니구나 뼈저리게 느끼고 그 뒤로 글쓰기를 멈췄었다. 시집은 글쓰기를 멈춘 날부터 나의 눈에 띄지 않았었는데  공교롭게도 '아무나 써도 되지 않을까'란 생각이 든 지금 다시 나의 눈에 들어왔다. 이 두 권은 가장 잘 보이는 곳에 두고  주말에 노란색 꽃이 피어있는 머그컵 만한 꽃화분 하나 사서 책상 모퉁이에 두기로 했다.

 




처음으로 내방을 가지게 된 것은 고등학교 2학년 때 방을 같이 쓰던 언니가 대학교에 들어가면서였다. 어느 날 부모님은   베이지색 민무늬 벽지 새로 바르고 앉은뱅이책상을 치우고 의자가 있는 책상과 책꽂이, 5단 서랍장을 사 오셔서 내방을 꾸며주셨다. 그 당시 장국영에 푹 빠져 있던 나는 고개만 들면 나를 보고 활짝 웃는 장국영의 브로마이드를 여러 장 사서 로 바른 벽지가 무색하게 벽에 붙이고, 공부하라고 사주신 책상에서 장국영에게 부치지 못할 편지를 썼었다. 어느 날은 서글픈 일로 이불을 쓰고 아무도 모르게 숨죽여 울기도 했었던 방. 첫사랑과의 밤샘 통화로 방 안의 공기가 후끈 달아오르기도, 처음 술을 마시고  온 날 천정이 파도가 되는 것을 경험하기도 했던   나에게 많은 처음을 함께한 방이었다.





엄마 걱정    (기형도)


열무 삼십 단을 이고
시장에 간 우리 엄마
안 오시네, 해는 시든 지 오래

나는 찬밥처럼 방에 담겨

아무리 천천리 숙제를 해도

엄마 안오시네, 배추잎 같은 발소리 타박타박
안 들리네, 어둡고 무서워
금간 창 틈으로 고요히 빗소리
빈방에 혼자 엎드려 훌쩍거리던

아주 먼 옛날 지금도 내 눈시울을 뜨겁게 하는
그 시절, 내 유년의 윗목


방 정리를 끝내고 내가 맨 먼저 한 것은 기형도 시집을 다시 읽기였다.

글쓰기에 집중할 수 있는 이 공간에서 어떤 이야기를 써내려 갈지 설렘이 벽지 속 기린의 목만큼 곧고 길게 뻗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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