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새 얼었던 흙이 수선화 잎이 나올 정도로 녹고, 나뭇가지는 생명을 이어가려 분주하고 치밀하게 꽃을 피울 준비를 하고 있는 봄이다. 왜인지 봄에는 얼었던 물이 녹아 냇물로 흘려보내듯이 장롱 속에 얼려있는 옷들을 정리해 내보내고 싶어진다. 패션은 돌고 돌아 다시 유행이 온다고 해서 유행이 지난 옷들을 버리지 못하고 언제 올지 모를 시기를 기다리며 옷장 속에 고이 모셔 두었던 적이 있었다.
바짓단이 나팔모양이던 청바지가 스키니진으로 바뀌고 다시 통이 넓은 바지로 돌아오고, 어깨가 장군님처럼 뽕이 한가득이던 재킷이 어깨선에서 딱 맞게 내려가던 것이 어느새 오버핏으로 유행이 돌아왔다. 하지만 세상의 유행을 감당하기에 젊어서 입던 통 넓은 바지를 소화해 내야 하는 나의 몸은 그때의 허리 사이즈가 아니었고, 오버핏의 재킷은 이미 장군님이 되어 버린 어깨가 재킷의 의미를 퇴색하게 만들었다. 그 뒤로 나는 철이 지난 옷, 적어도 3년 동안 입지 않은 옷은 아파트 재활용함에 넣고 있다.
옷 정리를 하기로 마음먹고 장롱 안을 스캔하듯 쭈욱 훑어봤다. 매해 정리를 한다고 하는데도 아니 매일 문을 열고 옷을 찾아 입을 때도 몰랐었다. 블라우스 같은 얇은 종류는 맨 위 오른쪽에, 카디건은 왼쪽, 스커트는 맨 아래 칸에 나름 정해진 방법대로 잘하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장롱 속을 본 나의 한 줄 평은 '아! 왜 이렇게 정신없지'였다. 옷걸이에 걸려있는 옷들을 꺼내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어서 한꺼번에 다 꺼내 다시 정리하기로 했다. 그러고 보니 옷걸이 종류가 다양하다. 세탁소에서 옷 찾아올 때 주었던 하얀색 철재 옷걸이와 옷이 흘러내리지 않는다고 샀던 옷걸이, 제법 비싸게 옷을 살 때 주었던 고급 진 옷걸이.
다양한 옷걸이에 나도 모르게 서열을 정해서 옷을 걸어 놓은 것이 보였다. 싸게 샀던 버리면 그만인 막 입는 옷은 철재 옷걸이에 대충, 나에게 제법 잘 어울려서 애착이 가는 옷은 흘러내리지 않는다고 샀던 옷걸이에 그리고 중요한 자리에서 나를 기죽지 않게 할 것 같은 해가 지나는 것이 아까운 좋은 옷은 고급 진 옷걸이에 한 개의 주름도 허락하지 않을 기세로 가지런하게 걸어놨던 것이다.
3년간 나에게 선택을 못 받은 옷들은 버리려고 봉투에 담고 나머지 옷들은 다시 정리를 하면서 걸었다. 그런데 옷과 옷걸이가 바뀌지는 않았다. 여전히 그냥 그런 옷은 철재에 좋은 옷은 좋은 옷걸이에. 그걸 인식하고 철재 옷걸이에 걸린 옷들을 전부 꺼내서 다시 흘러내림 방지 옷걸이에 가지런히 걸었다.
어쩌면 일상도 옷걸이와 같지 않을까? 옷장 정리를 하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든다. 오늘은 어떤 걸이에 걸리는 날일까? 그냥 아무 날이었듯이 휘어진 걸이에 대충 걸릴까? 아니면 구김 하나 없이 행복한 날이어서 좋은 걸이에 걸릴까? 스스로 정해서 걸을 수 있으니 이왕이면 좋은 마음의 걸이를 택해보는 건 어떨까? 한때는 나와 함께 했던 봉투 안의 옷들을 재활용함에 넣고 오면서 본 부지런한 매화꽃 몇 송이가 화신풍과 함께 나를 자꾸만 봄 속으로 이끌어 기분이 좋다. 옷장 정리 하기를 잘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