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개
그리스 신화에서 가장 자주 등장하는 신은 단연 제우스일 것이다. 제우스(Zeus)는 올림푸스 12 신의 왕이면서 번개의 신으로 알려져 있다. 제우스의 번개는 매우 강력한 무기로, 그의 권위와 힘을 상징한다. 많은 신화에서 제우스의 번개가 등장하는데, 그 무기는 무소불위의 능력을 보여주었다.
무기라는 것은 시간이 지나면 개량되고 발전하는 것이다. 기술의 발전은 무기에 즉시 반영되기도 하고, 때로는 무기 개발과정에서 얻은 기술이 과학분야의 놀라운 진전을 이루기도 한다. 태곳적 무기인 제우스의 번개는 오랜 시간이 흐른 지금 어떻게 되었을까? 번개를 압도하는 새로운 무기가 등장하지 않았을까?
제우스가 가졌던 번개는 실제로 엄청난 능력을 가진 무기이다. 신들의 전투에서보다 실제 인간들의 생활에서 더욱 그렇다. 번개는 인간의 식량을 통제하는 도구이다. 식량 생산과정에서 작물의 성장에 필요한 질소의 공급량을 결정하는 것이 번개이다. 제우스는 그 번개로 인간을 비롯하여 지구상 생명체들의 목숨 줄을 좌지우지해 온 셈이다.
번개는 강력한 전기 방전 현상이다. 번개가 내리칠 때 대기 중의 질소 분자들은 고온과 고압에서 매우 활발한 화학반응을 일으킨다. 이 강렬한 반응으로 이온화된 질소는 빠르게 수증기에 녹게 된다. 안정하게 대기 중에 머무르던 질소는 천둥과 번개가 요란한 날, 빗물에 녹아 드넓은 대지에 뿌려진다.
식물과 동물 모두에게 질소는 가장 중요한 영양소 중의 하나이다. 화학비료가 없었던 과거에 지구상 생명체는 제우스가 번개로 뿌려주는 질소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빗물에 녹아내리던 질소에 목말라하며 생명체들은 언제나 질소 부족에 허덕였다.*
제우스가 제왕의 자리를 오래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이렇게 막강한 무기인 번개를 손에 쥐고 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세월의 흐름에 따라 신들의 이야기도 희미해질 무렵, 번개는 막강했던 그 힘을 잃게 되었다. 인간의 과학기술로 탄생한 화학비료의 출현이 그 결정적이었다. 인간들이 번개를 본떠 만든 '하버-보쉬 공정'이라는 질소비료 제조기술로 인해 제우스의 무기는 무기력해져 버렸다. 이제 지구 생명체의 목줄이 제우스로부터 인간들에게 넘어온 것이다.
산업혁명과 함께 등장한 값싼 화학비료는 녹색혁명이라고 불리며 인간의 식량 자족에 크게 기여하였다. 토양에 뿌려댄 비료는 지구 생명체들이 요구하는 질소를 공급하고도 남았다. 인간의 수중으로 들어간 번개 제조기술로 사람들은 화학비료를 만들어 엄청난 양의 질소비료를 아낌없이 땅에 뿌려댔다. 그렇게 뿌려진 질소는 흙을 과영양 상태로 만들어 놓았을 뿐 아니라 질소가 빗물에 씻겨나가 호수와 바다에서 원치 않는 식물성 플랑크톤을 엄청나게 발생시키는 녹조(또는 적조) 문제를 일으키고 있다.
지금도 번개는 여름날 천둥과 함께 요란스럽게 대기를 강타하지만 그 기능은 무기력해졌고 생명들은 더 이상 이 번개를 기다리지 않는다. 아마도 제우스는 어깨가 축 처진 채로 하늘 구석 어디선가 고개 숙이고 있을 것이다. 이제 아무런 힘을 발휘할 수 없으니 인간의 세상에 더 나타날 이유도 없다. 그렇지만, 제우스는 자리를 떠나지 못하고 인간 세상을 지켜보고 있을 것이다. 초록빛 호수를 안절부절 걱정스럽게 바라보면서.
* 물론 인간보다 훨씬 앞서서 질소고정 기술을 발명한 생명체가 있었다. 아조토박터(Azotobacter sp.) 등 뿌리혹박테리아로 불리는 이들이다. 그 세균들은 혁신적 진화를 이루었지만, 인간의 욕심에는 턱 없이 부족한 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