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호자’의 배신.
롱 레그스 (2024)
스포주의
공포란 감정은 언제 생길까? 압도적인 존재가 나를 위협할 때? 물론 공포스럽지. 예정된 죽음이 목도했을 때? 역시 공포스럽고. 하지만 그게 ‘원인’은 아니다. 공포의 원인은, 그 압도적인 존재가 나를 ’어떻게‘할지, 죽음 이후에는 ’어떻게‘될지 ’ 모르기 때문‘에 그 모든 것은 두려움으로 우리에게 다가오는 것이지.
롱레그스의 공포는 대형 교통사고 현장을 멀리서 지켜보는 것과 같다. 언제 어디서 폭발이 일어날지 몰라서 불안한 와중, 새어 나온 가스의 냄새가 퍼져 현기증이 나는 와중, 수십 명의 비명이 동시에 모든 게 엮여서 들려와 하나하나의 비명은 알아들을 수 없는 속삭임(혹은 소음)이 되어버리는 그런 현장. 그리고 주인공 ’하커‘는 기억을 잃은 채 그 현장에 벗어나 관망하고 있는 중이다. 안타깝게도, 여전히, 피를 흘리고 있는 채. 그리고 그녀는, 그런 현장에 다시 돌아가야 한다. 어둠을 밝히기 의한 성냥을 쥔 채.
불을 붙이면 더 큰 폭발이 일어날 것을 알고 있는 채 말이야.
나는 양들의 침묵 같은 수사물 일 줄 알았는데, 악마가 엮인 이야기였다. 아니 모든 게 악마의 손에 놀아났다고 해야 할까. 주인공인 ‘하커’도 ‘하커의 엄마’도 하다못해 ’카터 요원‘과 그 가족까지. 그렇기에 이 이야기엔 희망은 없다. 십자가가 있는 장면에선 거의 이를 비웃듯 모든 ’죄‘가 일어나는 점이 묘한 감상을 남긴다. 무엇보다, 최초의 사건에선 십자가 아래서 ‘신부’가 죽기도 했으니깐.
인상 깊은 점은, 그 신부가 영어로는 ’파더‘라는 점. 그리고 이 영화 속 연결된 모든 사건은 ’아버지‘가 가족을 학살하고 자살한다는 점을 생각해 보면, 더더욱 ’악마‘란 존재가 얼마나 ’말장난‘을 좋아하는지, 그리고 그 웃을 수 없는 ’농담‘ 속에서 이 악마가 비웃고 싶은 게 뭔지 떠올려본다.
아버지, 혹은 신. 그들은 보호하는 존재이다. 만약 그 존재들이 더 이상 ’보호‘를 자처하지 않는다면? 더 나아가 ’위협‘의 존재가 된다면? 슈퍼맨이 적이 된 상황을 상상하면 절망뿐인 결론만 나오는 것처럼. ’보호‘라는 개념은 그 안전하다는 이면 뒤에 ’보호‘받는 입장에선 근원적인 공포심이 생길 수밖에 없다. 일종의 위계관계랄까. 영화 속 사탄은 그 보호라는 개념을 뒤집음으로써 신성모독을 하고 싶었던 거 아닐까. 말 그대로 땅과 하늘을 뒤집는, ‘아래층 선생님’이 위층으로 가기 위해서.
이중에 주인공인 하커는 다른 피해자들관 다르다. 그녀는 ‘미혼모’의 자식이었기에 ‘아빠’의 존재가 없기 때문이다.
하커의 엄마는 혼자서 ’엄마‘이자 ’아빠‘역할을 했어야 하기 때문에 악마가 그녀를 타깃으로 삼으려면, 그녀에겐‘아빠’의 존재가 필요했다. ‘보호’의 존재. 그렇기 때문에 사탄과 ‘롱레그스’는 하커를 궁지에 몬다. 그녀가 그녀의 엄마에게 ‘의지’하도록. 엄마의 보호아래 안식을 찾도록.
이에 대한 증거로 하커의 ‘웃음’은 엄마와의 대화에서만 드러나며, 하커의 불안과 위협은 롱레그스의 엄마에 대한 살해협박으로부터 비롯된다. 하커가 엄마를 잃는 것이 두려워지도록. 더 이상 자신이 의지하는 것이 사라질 것을 두려워하도록.
‘롱레그스’는 얼굴이 없는 꼭두각시다. 얼굴에 하얀 분칠을 한 이유는 그가 말 그대로 ‘공백’의 얼굴임을 표현하는 듯하다. 그래서 그의 서사는 중요하지 않다. 이유 역시 중요하지 않고. 그가 등장하는 장면이 대부분 밝은 이유는 ‘어둠’으로서의 사탄이 등장할 이유가 없기 때문에, 그 자체가 이미 사탄의 빙의체로서 활동하기 때문이 아닐까 싶은 생각이 든다. 그는 과연 악마로부터 무엇을 얻었을까.
공범인 하커의 엄마는 자기가 ‘보호’하고자 했던 ‘하커’의 손에 죽는다. 그 죽는 시점 역시 눈여겨 볼만하다. ‘롱레그스’가 죽고, 그녀가 ‘사탄의 대리인’이 되는 순간. 그녀를 보호하기 위해 했던 그 범죄의 조력이 ‘주체적’으로 변해 사탄을 숭배하는 인사말을 꺼내는 순간 그녀는 칼을 꺼내 들고 ’하커‘를 살해하려 한다. 이 역시 ‘보호’의 역전. 이윽고 하커가 쏜 총에 맞아 사망한다. 안타깝게도 그녀의 마지막 ‘보호행동’인 하커의 ‘인형’을 부수어내는 것이 하커를 어느 정도 그 사탄의 영향력에서 벗어나게 만든 것이겠지 란 생각을 한다.
허나 그녀의 의지는 겨우 ‘반쪽짜리’다. 그녀가 사이킥 테스트를 받을 때 8번 맞고 8번 틀린 이유는 그것 때문이다.
‘인형이 파괴돼서 영향력에 벗어나야 하는 거 아니야?’는 사탄이 심어놓은 ‘절망’을 가중시키기 위한 속임수. 왜냐고? 캐리 앤 카르마는 왜 죽었겠는가. 이 영화에서 눈에 보이는 것들은 전부 사탄의 장난감이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이 영화에서 ‘신’은, ’보호‘는 없다. 영화에서 묘사한 바에 따르면 인형에는 ’롱레그스‘의 신체가 들어있다고 한다. 나 역시 그가 정말로 ‘안식’따위는 없는 사후가 되면 좋겠지만. 그는 계속 존재할 것이다. 이 세상, 곳곳에, 악의를 퍼트리며. 그렇기 때문에 하커는 인형을 파괴하지 못한다. 안타깝게도.
희망도 해피엔딩도 없는 영화다. 하지만 세상의 어느 한 면은 너무 어두워서, 이런 이야기도 당연 존재할 수 있는걸. 각본이 이런 좌절감을 안기고 싶었던 거라면 나는 잘 쓴 각본이라고 생각해.
카메라가 씬을 담는 것도 꽤 마음에 들었다. 자세히 보고 싶지만 이 영화의 카메라는 대상에 가까워지는 걸, 절대적으로 거부한다. 가까워지는 순간은 눈을 돌리고 싶은 순간에만 ’허용‘된다. 관객으로 하여금 이 이야기에 멀찍이 떨어져서 ’보호‘받는 느낌을 주다가 이내 폭력에는 눈앞에 목도하게 만드는 그런 장면들. 괴롭지만, 영리했어. 분명.
그래서 추천하냐고? 그건 좀 어려울 듯하다. 좋은 영화였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좋아할 수 없는 영화라고 생각하니깐. 다만 나는 좋았어. 세상의 어둠을, 어떤 공포를 이해할 수 있다는 점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