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도적인 불쾌함. 그리고-
에밀리아 페레즈.
(먼저, 영화의 제작진들의 발언, 영화 내 외적인 논란들에 관해선 마지막에 이야기하겠습니다.)
에밀리아 페레즈를 보고 나서, 나오면서 느낀 감정은 무엇보다 ‘불편함’이었어요.
게다가 그 불편함이 ‘의도가 다분한’ 느낌이라서 의문이 들었고요. 일부러 관객을 불편하게 만드는 거야 이미 숱한 명작들이 그래왔지만 또 한편으로는 이 영화가 과연 그 정도 수준인가? 아니 더 나아가선 이 불편함이 목적이 있는 걸까? 하는 생각까지 닿더라고요.
뮤지컬 영화라는 지점을 차치하고 나서라도 이 영화의 서사는 의문점이 많습니다. 각 인물들의 행동의 원리가 일관적이지 못하다고 할까요.
심적으로는 양심의 가책을 느끼는 변호사 리타는 마음속으로는 이 상황의 모두에게 죄를 물려고 하지만 그 대상에 ‘에밀리아’는 빠져있습니다. 그가 겉모습이 변했다고 한들 ‘마니타스’의 과거가 사라지는 게 아닐 텐데 말이죠.
이 와중에 에밀리아는 모든 걸 버리고 새로운 시작을 위해 성전환을 했지만, 이내 다시 ‘마니타스’가 가지고 있던 삶. 가족들을 다시 불러옵니다. 더 나아가선 그 가족들을 다시 데려와놓곤 또 다른 여성과 사랑에 빠지는 일도 서슴지 않죠.
이처럼 등장하는 주요 인물들의 태도는 일관적이지 못하고 혼란스럽습니다.
영화의 전반부 넘버 중에 리타와 의사의 대화로 이루어진 부분을 생각해 봅니다.
‘영혼이 그대로라면 소용없다’ 의사의 입장과 와 ‘모습이 바뀌면 사람이 바뀌고 환경이 바뀐다’라는 주제가 될법한 중요한 대립이 전혀 무의미해져 버리는 인물의 행동을 보면서 참 혼란스럽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특히나 이런 비일관적인 인물들의 행동양태에서 더 기묘함을 느끼는 부분은, 이 영화의 중요 요소들입니다. 리타의 양심, 에밀리아의 성전환 사실, 제시의 외도와 사별 등등 이 인생을 대표하거나 흔들만한 사건들을 다룸에 있어서 이 영화의 태도는 매우 방만합니다.
리타의 양심은 계속 강조되지만 정작 그녀는 돈을 벌기 위해선 무슨 짓이든 합니다. 결국엔 돈이 아닌 에밀리아를 구출하기 위해 갱단의 힘을 빌리는 모습까지 보이죠. 여기서, 그럼 그녀의 양심에 대한 연출은 왜 필요한가?라는 의문이 남습니다. 그녀의 양심을 이용해 노래 하나 불렀으면 된 일이었을까요?
에밀리아의 성전환의 부분도, 이야기의 반을 나누는 아주 커다란 사건입니다만, 이 역시 후반부에 가서는 큰 문제가 아닙니다. 굳이 ‘성전환’이었나 했나? 하는 의문이 계속 남습니다. ‘이 사람이 전의 존재와 알아볼 수 없을 만큼 변함’을 이야기하기엔 여러 가지 방법이 있으니까요. 왜 굳이 ‘꼭’ 성전환 이어야 했을까? 그 이유가 겨우 마니타스의 ‘태어났을 때부터 내 영혼은 여자였다’라는 말 한마디 때문이라고 받아들이기엔 이 역시 의문점입니다. 이건 너무 게으르지 않나요. 감독님.
제시의 외도와 사별에 대한 심리, 마니타스의 아들의 그리움, 에밀리아의 새로운 사랑까지 영화를 구성하는 여러 요소들은 분명히 존재할만 하지만, 단지 ‘있을법하다’로 뭉뚱그려 묘사되어 있어요.
그렇기에 이 관계들의 원인과 결과를 연결 짓는 일이 상당히 불친절하고 더 나아가선 불쾌한 기분이 들 정도였어요.
이 혼란스러운 이미지와 관계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고민을 많이 했습니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가, 결국 ‘멕시코’라는 나라의 혼란스러운 정세가 생각나더라고요. 하루아침에 시체로 발견되어도 이상하지 않을 치안. 이런 상황에서 필요한 건 무엇보다 힘입니다. 돈도 사람도 마음대로 휘두를 수 있는 그런 힘.
그런 힘으로 왕좌에 도달한 왕. 마니타스는 모든 걸 가져야 하는 자리에서 바라는 건 어쩌면 ‘영웅’이었을지도, 아니 더 나아가선 ‘성녀’였을지도 라는 생각에 닿습니다.
이 ‘모든 걸 가져야 함’의 태도는 에밀리아를 설명할 수 있는 유일한 문장이라고 생각해요. 그녀는 무언갈 가지기 위해 어떤 것도 쉽게 버릴 수 있고 심지어는 쉽게 다시 가져올 수도 있습니다. 그녀가 원하는 건 모두 다 가질 수 있는 것처럼 영화는 묘사해요. 이 과정에서 일어나는 범법, 조금 느슨하더라도 타인의 마음은 전혀 중요하지 않습니다. 대표적으로 리타의 경우가 그렇고, 심지어 이 ‘양심 있는’ 변호사 또한 이 에밀리아의 원하는 바를 이룸에 대해서는 상당히 예외적으로, 게다가 적극적으로 범죄에 가담합니다. 리타뿐만이 아닌 에밀리아/마니타스의 모든 주변인물들도 그의 뜻대로 휘둘릴 뿐이죠.
그녀는 일종의 폭군입니다. 그녀의 겉모습을 아무리 성녀로 포장한다고 한들, 그녀의 영혼은 여전히 왕좌에 앉아 있고요.
그래서 그녀를 본뜬 성녀상의 묵주에 피가 흐르고 있었나 봅니다.
-
다만 이런 식으로 영화를 끝내버리면, 이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너무 불쾌한 의미가 되어버립니다. 겉이 바뀌어 봤자 영혼이 그대로라면 변하는 것은 없다. 그리고 그 단죄가 죽음이라는 점으로 받아들이게 되면, 대체 이 영화는 누구를 대표할 수 있는 영화일까요.
맥시코인들을 왜곡되게 표현하고, 트랜스젠더의 수술을 공장에서 찍어내듯이 하는 듯 넘버를 구성하고, 트랜스젠더에게 ‘겉모습이 바뀌어봤자 ‘라고 말하는 태도가 과연 어떤 의미를 어떤 감동을 우리에게 줄 수 있는 걸까요?
이 영화가 ‘의도적으로 불쾌하다’는 지점은 여전히 유효합니다.
그리고 저는 ‘이 영화는 맥시코인을 위한 영화가 아니다.‘라는 제작진들의 태도에서, 이 영화의 최소한도의 존재 가치마저 의문이 드는 걸로 마무리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