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란 드레스의 그녀는 세상을 깨부수고.
악녀나 마녀, 같은 단어. 왜 남자에게는 해당하는 단어가 없는 걸까 한번 생각해 봐.
그러고 나서는 떠오르는 생각.
여전히 ‘여성’은 다른 기준으로 읽힌다고 생각해. 예전에도, 그전에도, 그리고 지금도.
중세에선 매매혼이란 게 너무도 당연한 일이였겠지.
그런 역사적 사실에 불만은 없다고 생각해.
현대에 들어서는 적어도 명목상으로는 이루어지지 않고 있으니까 굳이 불만 가질 이유는 없지.
다만 명목상 사라진 것들이 실질적으로 사라졌냐까지 생각하면, 조금 골치가 아파오기도 하고.
여전히 ’ 결혼‘이란거 말이야, 잘 만 하면야 ’ 신분 상승‘의 익스프레스 티켓이니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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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중 캐서린도 그 결혼식에는 새로운 세상에 기대감을 갖는 듯한 표정이 있더라.
자세한 사정은 모를지언정 그 고속티켓의 주인공이잖아.
그때는 다 그렇게 살았으니, 나름의 행복을 꿈꿨겠지.
다만, 그녀가 그녀를 구입한 시아버지에게 겨우 돈 주고 사온 사유물 취급일 줄, 게다가 애 낳는 기계정도의 취급일 줄 열일곱 소녀는 상상하지 못했던 듯해.
사유물이라는 거, 그녀의 재산상 주인이라. 권력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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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고, 대를 잇는 일이라도 가능했냐 하면, 남편이라는 작자는, 밤마다 하는 짓이라곤.
옷을 벗겨놓고 손끝하나 대지 않고는 관음 하며 자위를 하는 일이지.
그런 걸로는 대 라는 게 이어질 리가 없는데 말이야.
대충 그려지는 거지. 아버지와의 틀어진 관계에 아들이 내비치는 일종의 시위.
그리고 그 시위의 깃발은, 발가벗겨놓은 캐서린이고.
왜냐고?
이유야 별게 있나, 단지 아버지가 사 온 예쁜 인형이잖아. 무려 가장짓 좀 해보라고 말이야.
어쨌든 받은 거니 그 예쁜 인형은 가주에게 소유되게 되는 거지. 아내라는 이름으로.
그녀의 관계상 주인이라. 권력이라.
캐서린이 처음에 원한 건 별게 아니었는데 말이지.
약간의 산책이나, 간식정도 말이야. 17살 새신부가 원할 그런 것들.
아니면 친구라던지.
그 친구라는 거, 그 지점에 설 수 있을지도 모를 ‘안나’는 시대에 벗어나지 못하는 인물이야.
명령이 아니라면 행동하지 않는, 자신의 출신조차 잊어버릴 정도로 너무 오래 복종하고 살아온. 하인의 전형.
종은 돼도 친구라는 게 가능할 거라고 생각조차 못하는 시대의 적합자.
아무튼. 그런 간단한 것조차 해결이 되지 않는 시간이 지나다가 큰 어른도 남편도 없는 기간이 찾아오지.
소위 아랫것들의 유흥(이라고 표현했지만 안나를 대상으로 한대 집단 강간)의 모습을 보고 충격을 받고, 한편으로는 흥미가 생기는 것도 참 묘한 부분이야.
아 ‘캐서린’. 세상에 너무 많은 호기심이 있는 안주인.
자기가 어떤 힘이 있는지 너무 잘 알고 있는 그녀.
그녀 스스로 누군가에게 종속되어 있으니 그 ’ 주종‘이라는 관계를 누구보다 잘 이해하고 있겠지.
그리고 그 권력으로 억누른 것들 중엔, 약간의 미끼만 있으면 순식간에 튀어 오를 거라는 것도.
’ 세바스찬‘은 그런 안주인에게 끌려 안주인의 침소를 찾게 되지.
이 캐서린의 욕망이 본질적으로 솟아오르는 장면 말인데.
이 플롯이 불편하게 보일 수도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은 들어.
분명하게 거절의사를 밝힌 ’ 캐서린‘에게 강제적인 키스가 이뤄지고, 그다음 스스로 적극적으로 섹스를 리드하는 모습.
강간판타지로 느껴지는 이 장면.
다만 개인적인 의견을 얹자면 이건 그렇게 읽힐 장면은 아니라고 봐.
적어도 캐서린은 ‘잠자코 당하기만 할’ 사람이 아니야.
그녀가 유흥장면 에서의 모욕을 겪고도 ‘세바스찬’의 이름을 묻고 비가 곧 올 거라는 궂은 날에 굳이 산책을 하면서 세바스찬의 시선에 계속 나타났던 건, 권력이란 걸 우습게 보는 일종의 동질감을 기반으로 한 호감이었을까? 싶은 생각.
그래. 그녀는 권력을 사용할 줄 알고 더 나아가선 이 모든 상황 자체를 계획할 정도로 영리한 사람인거지.
이쯤에서 안 나와 세바스찬. 이 둘이 가지는 의미도 또 생각해 볼만하지.
불장난보다 더 뜨거운 캐서린과 세바스찬의 밀회가 계속되는 중에, 돌아오는 시아버지.
캐서린의 부정함을 한눈에 알아보곤 이에 대한 비난을 하지만, 상대를 잘 못 고르고 말았네.
악행이라는 게 으레 그렇듯, 시작한 후엔 중력처럼 가속도가 붙으니깐.
캐서린은 더 이상 참지 않고 큰 어른을 독버섯으로 암살해 버려.
그리고 권력으로 안나에게 그 살해현장의 동조자로 끌어들이고.
아버지를 싫어했던 남편은 장례식에도 오지 않고, 결국 캐서린 혼자 장례를 치르는 장면이 지나가고.
(이것의 의미도 꽤 생각해 볼 만하다고 봐. 집안의 큰일을 책임지는 일은 상주의 가계 승계로 읽힐 수도 있다고 보거든)
안나는 이 일의 충격과 죄책감으로 실어증에 걸리게 되지.
아 안나… 이토록 착해빠진, 순진한 종. 그 ’순종‘이 결국 나중엔 그녀의 목을 조르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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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모든 일이 지나고 나서 갑자기 돌아온 남편이란 작자도 다를 것 없이, 캐서린의 아내다움에 시비를 걸지. (재밌는 건 그 남편이란 작자는, 단. 한. 번. 도 캐서린을 아내로서 취급한 적이 없다는 게 참 웃기지도 않을 이야기.)
모욕과 폭력에 캐서린은, 방 한편에 숨겨둔 세바스찬을 꺼내와 보란 듯이 정사를 하려고 함으로 남편에게 모욕을 주고, 이내 그 남편은 그 둘에 의해 살해되는 것으로 또 하나의 족쇄를 끊어내는 데 성공해.
재밌는 점은 첫 번째 살인처럼 그녀는 세바스찬을 ‘동조자’로 끌여들였다는 점. 물론 그 방법은, 자신이 휘두를 수 있는 권력으로.
아 세바스찬… 제대로 악함도 선함도 확실치 못해 가지는 ‘죄책감’이, 그게 그의 목을 조르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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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바스찬의 죄책감을 뒤로하곤, 적어도 캐서린은 잠시동안은 또 꽤 행복한 시간을 보내는 와중.
이 망할 남편이라는 놈이 혼외자식을 만들어놔서 찾아오게 만들어놨더라는 사실이 그녀 앞에 놓이게 되지.
어쩌면 캐서린도 이쯤에선 멈췄을지도 몰라.
물론 충격적인 일이지만 그 아이는 죄가 없거든. 또 한편으론 사랑스럽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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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만 세바스찬은 그렇지 못했어.
그 아이의 생모가 존재하는 한 자신의 자리는 없다고, 살짝 맛본 주인의 삶에서 다시 종으로 돌아가는 일이 그새 어색해졌나.
캐서린 때문인지 아니면 스스로의 행복 때문인지 혼자 떨어진 아이를 죽이려다가 결국 살려서 대려와선, 생모에게 보여주는 세바스찬.
아들을 구해왔음에도 종 것이라며 빨리 꺼지라고 하는 생모에 발언에 분노하고 뛰쳐나가선 짐을 챙겨버리지.
생모의 모욕에 버틸 수 없다며 캐서린을 떠나려고 말이야.
(다만 이게 과연 진짜 이유일까? 단지 죄책감에서 벗어나려고. 자신을 조종하는듯한 캐서린에게 벗어나고 싶어서 삼은 구실 좋은 핑계일지도 모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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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캐서린은 결국 멈추지 않는 방법을 택해. 세바스찬과 함께 아이를 죽이지만, 결국 꼬리는 밟히는 법.
여러 증거들이 그녀를 향하고. 거기에 펑.
죄책감이 폭발한 세바스찬의 자백. 빼도 박도 못하게 된 상황에 그녀는 잠시 고민하다.
’ 안나와 세바스찬‘이 벌인 짓이라며 거짓 고발을 하지.
심지어 이런 말을 하면서.
’ 안나가 범인이 아니라면, 스스로 증언할 것이다.’
…
그리고 안타깝게도 ‘안나’는 한마디도 하지 못해. 그렇게 안 나와 세바스찬이 처형되도록 옮겨지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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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일이 끝난 캐서린은
처음 큰 주인과 남편이 있을 때와 같은 드레스를 입고
같은 공간에 와서 같은 자리에 같은 자세로 앉아.
같은 프레임에 이번엔 스스로를 넣으면서.
처음으로 돌아와서, ‘악녀’나 ‘마녀’ 같은 거 참 편리한 단어야.
남자보다 여성을 지칭하는 단어, 심지어 모멸하는 단어가 더 많다는 건 참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지(대표적으로 놈보다 년이 훨씬 모욕적인 어감인 것처럼)
왜 그럴까? 왜 그런 불균형이 생기는 걸까? 하면,
세상을 정의하는 방식이, 상기한 대로 ‘여성’을 읽는 방식이 뒤틀려서 그런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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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적인 통념이나 도덕관으로 읽으면, 캐서린은 빼도 박도 못할 악인에 소시오패스 살인마인건 부정할 수가 없겠지만.
이 영화는 그런 눈에 보이는 것만 보고 읽기엔 너무 아쉬운 영화야.
특히나 인물들이 가지는 메타포 즉 서브텍스트들을 읽으면 이게 왜 단순한 ‘연쇄 살인마’의 범죄 기록인지 아닌지 알 수 있다고 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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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 어른과 남편.
좁은 의미에선 ‘가부장제’를 대표한다고도 할 수 있겠지만, 나는 ‘만들어진 통념’이라는 표현을 쓸까 해.
왜냐면 저 두 인물은 비슷한 듯하면서도 다른 부분이, 그리고 그 다른 부분에서 나름의 갈등이 있는 존재들이거든.
포함관계를 생각했을 때 ’큰 어른’은 가장 큰 세계를 구성하는 인물이야. 작중에 등장하는 모든 권력의 뿌리라고 할까.
그래서 그런지 이 큰 어른의 영향력은 영화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들에게 끼치고 있고, 하위의 남편이나 캐서린의 권력보다 더 우선되는 명령권을 가지는 존재지.
‘남편’의 경우는 그 아랫단계의 세계.
피복종자의 숙명인지는 몰라도. 그는 더 큰 세계에 반감이 있는 듯해.
그것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캐서린을 이용한 일종의 시위고.
(권력의 사용형태는 층계만 다를 뿐 하위 범주를 이용하는 형태가 같은 것도 참 재밌는 지점)
거기에 더 나아가서 혼외자까지 만들어서 증서까지 써서 나타나게 한 점을 보면 그 역시 자기보다 더 큰 세계를 깨트리려는 욕망이 있는 존재라고 봐.
다만 이 두 개의 권력은 색이 다를지언정 ’결‘이 같아서, 세상을 유지하는 욕망도, 세상을 깨트리는 욕망도 온전히 ’남자‘의 전유물로 유지시키고 싶어 해.
여기서 남자란 권리가 있는 <MAN>
즉 상류층 남성만을 국한하고 있고. 그렇기 때문에 하인들은 애초에 안중에도 없고,
같은 클래스의 캐서린에게는 아무것도 하지 않기, 혹은 아무것도 욕망하지 않기를 강요하는 거라고 봐
그리고 대립지점은 가문과 개인인 지점인 거고.
‘안나’ 그리고 ‘새바스찬’
상기한 두 세계를 깨트리는 일만으로 이야기가 끝나버렸다면 이 영화는 솔직히 그저 그런 페미니즘 영화가 됐을 거라고 생각해.
나 역시 세계라는 지점까지 도달치 못하고 가부장제라는 단계에서 멈췄을지도.
다만 이 영화의 칼날은, 캐서린이 벼른 것은 상층만을 향하고 있진 않는 것 같아.
‘안나’는 순종적인 하녀야. 매매혼이 합법이고 코르셋을 착용하고, 오로지 집안의 남자의 말을 듣는 게 아내의 역할인 시대에 너무도 적합한 인물이지.
게다가 심성도 엇나간데 없이 시대가 요구하는 ‘선’함까지 가지고 있으며 수치심과 죄책감 또한 풍부하게 가지고 있는 캐릭터야.
그녀의 그런 마음들이 모여 캐서린의 살인에 관련됐을 때, 그녀는 함구함을 강요받게 돼.
강요하는 건 그 누구도 아닌 그녀가 순종하는 ’세계‘ 그 자체.
결국 그녀는 그 세계를 벗어나지 못해서, 캐서린의 모함에도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죽음을 맞이하게 돼.
안타깝지만, 그녀 역시 이 세계를 유지하는데 일조했다는 원죄가 그 지점에서 생겨나는 거지.
’세바스찬’
감히 안주인을 탐욕한 노예. 아마 그 부분이 캐서린의 마음을 사로잡았을지도 모르지.
캐서린의 욕망이 상위의 세계를 업신여기는데 목적이 있다는 점에서 자신에게 기어오르는 이 남자는 캐서린에겐 이 답답한 집안에서 동류의 느낌을 느꼈을지도.
그래서 캐서린이 조종한 대로 이끌려 캐서린의 연인이자 동조자의 역할을 하게 되지.
기본적으론 궤가 같다고 할 수 있겠지만, 그는 ‘캐서린’ 같은 좌절감을 이전에는 겪은 적이 없어.
그는 노예세계에선 여자를 가지고 노는 권력자였거든. 그리고 위를 향한 계급의 층을 뛰어넘을 생각은 이전에는 하지 않았고.
기본적으로 그 역시 ‘세상에 순응’하는 존재로 지내다가 단지 좀 ‘나약해 보이는 여자’를 탐했던 것뿐(심지어 그것은 그 대상이 의도한 대로 움직였을 뿐이고)
그 ‘의도적으로 부여된 권력‘(남편-캐서린과 같이)은 결국 드러나게 되는 세바스찬 스스로의 나약함과 두려움에, 그리고 그 때문에 캐서린까지 원래의 세계의 법칙으로 단죄하고 단죄받으려 했다는 게, 이 캐릭터의 과오.
이렇듯 안 나와 세바스찬은 캐서린을 옥죄는 세계의 유지에 동조하는 ‘죄’가 있어 그 목숨을 빼앗기게 되는 거지.
그리고 그 모든 단죄를 행하는 것이 오로지 ‘독존’하게 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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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캐서린.
캐서린은 스스로 욕망하는 것에 거침이 없어.
마치 진행방향에 저항이 없는 존재라고 해야 할까.
행동하지 않을지언정 움직이기 시작하면 ‘절대 지지 않는’ 의지를 가지고 있는 존재지.
그런 그녀를 막아서는 존재들은 다 파괴된 걸 보면 말이야.
다만 그 방법은 도덕이나 윤리 같은 걸로는 읽을 수 없어.
그녀는 영리하고 이기적이면서 자신이 가지고 있는 모든 자원을 적재적소에 잘 활용하는 편이거든. 권력도 돈도 사람도 심지어 사랑까지도.
그런 그녀가 새로 쓰는 세계는 기존의 권력의 법칙과는 많이 달라.
그리고 그 세계는 기존의 통념을 잡아먹으면서 더더욱 확고해지지.
어쩌면 기존의 세계들을 하나씩 파괴하는 일은
자기에게 부여된 ‘소유물’,‘아내’,‘주인’, 애인‘ 등등의 껍질을 벗어내는 과정이었을지도 모르겠다.
그 모든 사건이 지나고 온전히 혼자가 된 캐서린.
캐서린은 더 이상 어떤 역할도 존재하지 않아.
’ 소유물‘도 ’아내’도 심지어 ‘여자’라는 것 마저 남아있지 않을지도.
온전히 스스로. 독존하는 존재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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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디 맥베스는 이런 서브텍스트들을 읽어야 완성되는
영화 아닐까 싶어.
관계도에서 나타나는 힘의 형태를 가늠하면서 비단 ‘사람과 사람’의 이야기가 아닌, 좀 더 거시적인 관점이 필요한.
기존의 ‘레이디 맥베스’는 구슬리는 자였다면, 여기의 캐서린은 행동하는 자로.
’권력‘이라는 망치를 들고, 통념의 세계를 학살해 스스로의 세계를 구축하는
그런 ’초월자‘나’유아독존‘의 모습일지.
아니면 그저 욕망을 쫓아 주변 모두를 파괴한 ’악녀‘로 남길지
이건 영화가 끝나고 남겨진 관객의 몫이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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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를 보는 일은 한 번 일지라도, 읽히는 건 두 번이라는 말이 있더라고.
오래간만에 꽤 깊게 생각해 보니 머리가 좀 띵한데, 그런데도 꽤 재밌었어.
나도 처음에 이 영화의 엔딩을 마주했을 땐, 조금 혼란스러웠는데 글을 쓰다 보니 조금 정리가 된 듯싶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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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처음으로 돌아가서, ‘악녀’나 ‘마녀’라는 단어가 존재하는 세계가 파괴되었을 때.
우리는 ‘캐서린’을 어떻게 정의해야 할까?
이 질문에서 이 영화는. 또다시 시작되는 일이 될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