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스로 존재할 수 없는 꿈을 꾸는 예술가.
좋은 영화였습니다.
긴 러닝타임이 무색하게, 상당한 수준의 몰입을 경험할 수 있는 거대한 영화. 다만 영화를 보고 나와선 소중한 영화친구들에게 이렇게 말했어요.
‘너무 좋은 영환데, 뭔가 마음에 턱 하고 걸리는 게 있어. 그게 뭔지 잘 모르겠어.‘
하지만 사실 알고 있었어요 그걸 입 밖으로 꺼내는 게 조금, 두려웠을 뿐.
긴 영화의 러닝타임에 비해 피로도는 낮은 편이라 느꼈습니다. 이유를 생각해 보자 하니 이 영화 꽤 명확한 부분이 많습니다. 사건이 일어나면 오래 끄는 법이 없이 사건-해결이 상당히 가깝게 붙어있고, 인물들도 크게 복잡할 것 없는 감정선으로 사건의 흐름에 올라와 있습니다. 표현하고자 하는 주제 역시 꽤 명확하다고 느껴 그런 지점들에서의 피로도는 상당히 낮다.라고 느꼈던 것 같아요.
다만 그 명확한 캐릭터성을 가진 인물들이 만들어내는 드라마는 꽤 깊이가 있습니다. 라즐로와 에르제벳으로 표현되는 각각의 이민자의 입장. 미국을 대표하는 듯한 반 뷰렌 가문. 그리고, 저의 그 불편한 의문점으로 남은 ‘조피아’까지. 이 인물들의 관계에서 표현되는 은유를 통해 드러나는 현실의 모습이 참 선연하다고 느꼈어요. 이민자의 삶을, 그 트라우마를 잘 표현했다고 생각해요.
에르제벳은 미국으로 이민 와 만나는 라즐로에게 이런 대사를 해요.
“난 당신이 무슨 일을 했는지 전부 알고 있어.”
하지만 나중엔 또 이런 대사를 합니다.
“당신, 대체 여기서 무슨 일을 겪은 거야?”라고요.
라즐로와 에르제벳의 관계성은 미묘하게 겹쳐 있습니다.
전쟁을 통해 겪은 고통은 분명 둘 다 가지고 있지만(그래서 안다고 했고), 안타깝게도 그 고통은 결국 ’ 다른 것‘이라는 걸 시간이 지나서 깨닫게 되죠.(그래서 무엇을 겪었냐는 질문을 하게 되는 거고요.)
더 나아가서는 각자 전쟁을 버텨내던 위치 (고향과 타향) 둘 다 그 둘에게는 고통을 주는 곳일 뿐이라 이런 존재들에게 ‘집’은 존재하지 않았다.라는 생각에 닿습니다.
그 서로 다른 고통의 이해의 접착제가 되는 것이 마약성진통제가 된다는 것도 꽤나 흥미로운 부분입니다. 원래는 라즐로가 이민당시 부러진 코의 통증을 줄이기 위해서 사용했던 것이, 에르제벳의 더 이상 움직이지 않는 다리의 통증을 줄이기 위해 사용된다는 점. 동일한 신체적 상흔으로 비롯된 고통과 동일한 그 고통의 해소 방법으로 둘은 완전히 이해하게 되는 것도 꽤 흥미롭고요. 더 나아가 그 과정에서 에르제벳이 죽음의 위기에 처할 때 라즐로가 그녀를 ‘구원’하고, 이후 에르제벳은 라즐로의 고백을 듣고, 고발행동을 통햐 그를 ‘구원’하려 했다는 것까지, 이 둘의 관계성은 꽤 탄탄하고, 아름답다는 생각도 듭니다.
반 뷰렌의 경우는 해석의 여지가 있다고… 생각하진 않습니다. 그는 본인의 성향을 숨기는데 거침이 없거든요. 어머니가 쉬어야 하는 공간에 ‘껌둥이‘가 있는 게 싫을 뿐인 백인, 자본가. 일뿐입니다. 모든 것이 힘과 재력으로 가능하다고 생각하는 족속. 그렇기 때문에 그는 작중에서 그 누구의 눈치도 볼 필요가 없습니다. 그를 ’이길‘존재는 없으니까요.
다만 이런 성향의 그와 ’ 예술인’으로서의 라즐로는 꽤 흥미로운 관계성이 형성됩니다. 자유롭게 하라고 말하면서 후원을 약속하지만, 여러 가지 방법으로 라즐로를 휘두르다 결국엔 선을 넘는 방법으로 그를 ‘겁탈’하는 장면은 화면으로 보는 ‘직유’가 참 오랜만이다. 싶은 생각이 들었어요. 오프닝 시퀀스의 ‘뒤집어진’ 자유의 여신상의 의미가, 이런 것 이였겠구나.
라즐로와 같은 죽음을 피해 피난 온전쟁 이민자에게 이곳은 집이 아니고, 자신을 착취하려는 존재들만(반 뷰렌뿐만 아닌, 가구점을 운영하는 자신의 가족도 포함해서) 가득한 세상이라는 것.
반뷰렌의 마지막은 에르제벳의 폭로로 이루어집니다. 단 한 번도 약자인적 없던 ‘강한, 미국, 남성, 재력가.’는 ‘나약한, 장애, 이민자, 여성’의 손으로 죽음을 맞는다는 것도 꽤 흥미로운 지점. 오프닝 시퀀스의 뒤집어진 자유의 여신상과 연결되듯 밤의 달빛에 내려지는 역십자가의 연결지점에서 이 이민자들이 느끼는 ‘미국’이라는 존재에 대한 영화의 태도를 볼 수 있는 듯해요.
조피아.
이 영화의 가장 복잡한 인물이 아닐까. 이 인물에 대한 해석에 따라 영화의 가치가 정반대가 될 정도의 존재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전쟁상흔으로 언어를 잃어버리고, 선대들의 노력으로 인해 말을 되찾음으로 ‘사상’을 가지게 되고, 기력이 쇠해버린 선대들의 말을 대변하는 ‘연설가‘로 변하는 그녀의 캐릭터성에서.
처음엔 의문을 다음에는 착잡함을 느꼈어요.
그녀는 전쟁피해자에서, 시오니스트. 즉 이스라엘을 하나의 성지, 종착역으로 받아들이는 사상가 되어버렸어요. 여기서 이스라엘이 옳냐, 팔레스타인이 옳냐를 따질 부분은 아니겠지만. 그녀가 본인의 상황에서 찾은. 즉 ‘이민자로서의 삶을 개선할 해결방안’이 제 눈에는 딱히 적절하다는 느낌은 들지 않습니다. 같은 이민자로서의 라즐로와, 에르제벳처럼요.(다만 에르제벳은 결국 정착지의 삶의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해 이스라엘행을 바라게 되지만)
비엔날레로 시간이 넘어와
그녀의 연설로 이 영화는 엔딩을 맞이합니다. 라즐로의 작품을 ‘유대인을 핍박한 감옥을 형상화’했다고 말하는 조피아. 다만, 정말 그런지는 모를 일입니다. 정작 그 모든 걸 만들어 낸 라즐로는 미묘한 표정으로 어쩌면 더 이상 ‘목소리’를 가질 수 없는 상태인지도 모르니까요. 안타깝게도 그런 업적을 만들어낸 세대는 쇠퇴하고, 업적을 해석하고 전파하는 새 대가 주류가 되고, 그 사상을, 생각을 이어갈 조피아의 딸의 세대가 앞으론 조명될 거라는 걸 느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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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타깝게도 이 영화의 엔딩. 즉 조피아가 라즐로를 ‘해석’하는 방법을 우리는 어떻게 ‘해석’하냐에 따라 영화의 가치는 달라집니다. 예술가로서 인정받았는지, 시오니즘의 부흥을 위한 재료로 쓰였는지는 영화를 보는 사람의 몫이겠죠.
다만 저는 라즐로가 그렇게 복잡한 사람이 아니었다는 걸 생각합니다. 그의 예술 사조가 전쟁 이전부터 유지돼 온걸 생각합니다. 단지 예술가라서, 흉한 걸 보고 아름답다고 말하지 못하는 외골수라는 사실을 떠올립니다.
영혼을 겁탈당하면서도, 단지 자신의 작품을 완성시키고 싶어 한, 미완의 작품을 남긴 예술가라는 사실을 떠올립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영화는 시오니즘을 해결방안으로 제시하지 않을뿐더러, 어쩌면 지금의 이스라엘의 행태까지도 미국과 크게 다르게 보지 않는다.라는 메시지를 전하고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라즐로에겐, 너무도 마음 아픈, 결말이지만 서도 말입니다.
에필로그.
결국 영화를 보고 느낀 ‘턱 걸리는 불편함’을 찾아내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드네요. 한결 마음이 편해진 기분입니다. 이래서 영화를 보고 생각하고 정리해야 하는 ‘소화’ 과정이 필요한가 봐요. 영화도, 영화에 대한 생각도. 꽤 즐거운 영화였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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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s. 최근 영화들 중에서도 단연 훌륭한 ‘오프닝 시퀀스’를 가지고 있어요. 불안하지만 웅장한 음악, 흔들리는 카메라, 빽빽한 인물, 답답한 배경, 고통스러운 내레이션을 지나 등장하는 회색하늘과 뒤집어진 자유의 여신상. 단지 몇 분 만에 느낄 수 있는 전율감은 비교가 불가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