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가르침, 어떤 보살핌.
사람에게 그렇게 큰 영향을 받았냐라고 한다면, 민망하게도 딱히 떠오르는 사람이 없어요. 하물며 부모님까지도 포함해서 말이에요. 그런데도 제 기억엔 두 분의 선생님이 떠올라요. 기묘하게도 그 두 분의 선생님들은 또 한 사건으로 엮여 있죠.
제가 아주 어렸을 때는 세상은 아직 관례라던가, 관습이라던가 하는 이상한 것들이 이상하게 받아들여지지 않는 때였죠. 아이들은 이유도 모른 채로 각각의 희거나 노란 봉투들이 든 선물들을 선생님에게 드려야 했고요.
확실하진 않지만. 작은 식당을 하셨던 우리 부모님들은 그런 쪽으로는 눈과 귀가 밝지가 않으셨던 것 같아요. 적어도 내가 아는 선에선 나를 통해서 무언갈 전달해 본 적은 없었으니까요.
머리가 벗겨지고 항상 단단한 회초리를 가지고 다니던 그 선생님. 공부를 잘하는 여자애보다, 동네에서 가장 큰 병원을 하는 아버지를 둔 남자애를 더 사랑하시던-
그래서인지 나는 항상 다른 애들보다 더 혼나고, 더 바보 취급을 받았고, 더 오랜 시간 학교에 남아있어야 했고, 더 많은 일들에 책임을 느껴야 했어요. 모든 다툼은 내가 원인이 되길 바라는 것처럼 주목받는 건, 기껏해야 열 살 남짓한 아이에겐 가혹한 일이 아니었을까 생각은 들어요.
그런 제가 학교에서 배운 거라곤, 나중에야 그게 차별이었다고 정리되기 이전의 감각들. 힘들고, 불공평하다는 것이었어요.
어거지로 혼나 다 집에 간 교실에 혼자 남아있어야 할 때면, 책을 읽곤 했었죠. 단지 지루하지만 않길 바라서였지만, 사실 그때의 영향도 지금의 나에겐 꽤 많은 것 같아요.
얼마 지나지 않아 적어도 학교에 혼자 남아 있어야 하는 벌은 겪지 않아도 됐어요. 저도 남들처럼 학원-이라는 걸 다니게 되어서, 학교가 끝나도 또 어딘가로 가야 할 곳이 있다는 것이 그 이유였어요. 컴퓨터학원이 전문이지만 초등학생의 전반을 교육하던 학원이었고, 처음에는 여자 선생님 혼자 하셨지만, 나중엔 남편분도 같이하시던. 그런 변화를 꽤 오래 봐왔던, 그런 학원.
아쉽게도 나는 교육받는다는 감각 이전에 훈육과 통제를 받던 아이였기에, 아주 다루기 어려운 아이였다는 점이고. 그건 새로 학원을 개업한 학원장님에게도 다르지 않았을 거예요.
교실형 수업은 몇 번은 나 때문에 진행되지 않았던 적이 있었던 것 같아요. 단지 나 때문이라고 하면 비약이지만 서도, 결국엔 거기서도 나는 따로 혼자 배워야 했거든요. 혼자 앉은 테이블과 볼펜이 끼워진 연필 다른 방에서 한자를 따라 읽는 아이들의 목소리. 깜지를 쓰느라 새까매진 손날. 해 질 녘의 빛에 비추면 흑연이 은은하게 빛난다는 걸 알게 되기도 하고.
하지만 원장님은 항상 수업이 끝나면, 나를 찾아오셨고. 나를 위해서 같은 수업을 한 번 더 해주셨어요. 지금 생각해 보면 엄청난 일이죠. 단지 한 명을 위한 수업이라니. 게다가 가장 중요한 건, 나를 분리하셨지만 나를 혼자 두는 건 항상 최소화하려고 하셨다는 점이에요. 시간이 나면 항상 나를 챙겨 주셨죠. 다른 아이들의 시선이 없으니 과자 같은 걸 챙겨주시기도 하고 책을 읽는 걸 좋아한다는 걸 알곤 몇 가지 책들을 챙겨서 집에 보내기도 하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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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루한 수학 시간과 힘들기만 한 체육 시간과는 다르게 미술 시간은 좋아하는 과목 중 하나였어요. 무엇보다도 그 시간은, 배우는 시간이 아니라 무언갈 ‘하는’ 시간이었기 때문에 적어도 간섭받을 일은 없었거든요. 개중에 잘 만든 것들은 교실 뒤편에 걸렸었지만, 그 별거 아닌 종이접기도 선별 작업을 통해서 걸린다는 걸 깨달았던 건 나뿐이었던 것 같아요. 물론 내 것이 전시되는 일은 단 한 번도 없었고요.
한 번은 학내 종이접기 대회가 있으니 모두 작품을 준비 해오라는 말이 알림장에 적혔던 날이 있었어요. 그날도 어김없이 학원에 갔고. 나는 혼자 있는 동안 색종이를 이렇게 저렇게 접어 바다를 만들고 싶어 했어요. 꼬깃꼬깃 접은 물고기와, 괜히 껴있는 개구리. 이상하지만 당시엔 전혀 이상하다고 느끼지 않았던 것들. 대부분의 원생이 같은 학교에 다녔기에 원장님도 종이접기 대회에 대해 알고 있었어요. 원장님은 그런 날 지켜보시더니. 몇 가지 종이접기를 같이 접어 주셨어요.
“—아, 이거 가져가렴”
수북이 쌓인 종이 접기들을 챙겨 가려는 때. 원장님이 학원에 있던 액자에서 종이 접기로 만든 고래를 꺼내 주셨어요. 다른 건 다 기억이 나는데 이건 접는 법이 기억나지 않는다면서. 네 ‘작품’에 이게 꼭 있으면 좋겠다고 하시면서 말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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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상을 받았냐고요? 사실 기억이 잘 안 나요. 기억나는 거라곤
“지원자는 뒤에 전시된 아이들 것만 받겠다.”라는 말과, 학원에 들어가지 못하고 앞에서 쪼그려 앉아 엄청나게 울었던 것. 그리고 노란빛 햇살과 멍이 든 손바닥만 기억이 나요.
그 어릴 때 역시 삶의 한 부분이고, 삶은 많은 슬픈 결말의 연속인 건 부정할 수 없어요. 앞으로도 그럴 거고요. 하지만 나쁜 일들 사이에서 좋은 일을 찾아내는 것도 중요한 기쁨이 아닐까, 생각해요. 이 일이 지금의 나에게 영향을 줬을까요? 으음…. 어쩌면요. 다행히도 나쁜 쪽으론 말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