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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결되는 우리.

전달되는 구원.

by 후기록

가벼운 이야기로 시작해 보겠습니다. 여전히 읽고, 보고 있습니다. 그 말을 처음 꺼냈던 때보다는 조금 더 많이 읽고 보는 중인 것 같아, 약간은 다행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저는 주변의 영향을 잘 받는 존재예요. (어느 누가 그렇지 않겠냐 만요.) 그래서 내 주변에 무엇을 두느냐에 따라 제 스스로의 온도가 꽤 많이 변하곤 합니다. 요즘 저는 조금 뜨겁고, 고요한 흐름을 가진 물성을 지닌 듯해요. 양손으로 귀를 막으면 들리는 혈맥의 용암 같은 ‘구르릉’ 소리를 들으며, ‘아, 이런 게 흐르고 있구나’ 하고 생각하곤 합니다.


변화한 것들 중 하나는, 역시 식습관이 아닐까 합니다. 최근에는 술을 꽤 멀리하게 되었고, 가끔 가열식 전자담배를 피우긴 하지만 연초는 완전히 끊었어요. 이런 것들이 주는 화학작용에 대해 회의감이 들었달까요. 물론 그것들이 주는 기쁨을 모르는 건 아니지만, 요즘의 저는 좀 더 ‘알고 싶다’는 욕망에 이끌리고 있는 듯합니다.


주중에는 퇴근 후에도 할 일들을 미리 만들어 놓는 걸 보면, 매일같이 지쳐 기절하듯 잠들더라도 그 피로가 당장의 힘듦이나 우울함으로 이어지지 않는 것이 참 산들바람처럼 느껴집니다. 놀랍게도, 지금의 무드가 봄과 참 잘 어울리는 것 같아요. 이런 봄바람이라면 얼마든지 타고 오르고 싶습니다.


어쨌든 먹는 것에서 어느 정도 해방되니 지출 관리가 꽤 크게 되더군요. 물론 ‘논다’마저 사치가 될 정도로 시간을 쪼개 쓰고 있는 탓도 있겠지만요. 최근에 읽은 『0원으로 사는 삶』의 영향도 조금 있는 듯합니다. 소비사회에 대한 경각심 속에서, 우리는 얼마나 ‘올바른 소비’를 할 수 있을까요? 어떤 소비가 과연 올바르고, 훌륭한 가치를 지닐 수 있을까요?


이제 막 찰나의 빛을 본 것처럼 아는 척하고 싶지는 않기에, 소비라는 발화 이전에 수차례 고민을 해보는 것. 내 삶을 바꿔 얻어낸 ‘돈’을 좀 더 소중히 여기는 것으로, 이 새로운 태도를 시작해보려 합니다.


이 모든 생각, 신체의 변화, 행동의 변화가 결국 ‘타인’으로부터 왔다는 생각을 합니다. 어떤 변화든 결국은 타자로부터, 혹은 자신으로부터 출발한다기보다는, ‘나’와 ‘당신’, ‘당신’과 ‘당신들’ 사이에서 일어난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자기만의 방에서 반복되는 자기 생각은 결국 기괴한 결론을 향해 예정된 여정일지도 모르니까요. 내가 이렇게 변해가는 만큼, 내 주변도 다양한 색으로 물들어가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타인에게 새로움을 강요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먼저 새로워져 그 새로움이 또 다른 이에게 전달된다면, 그것만큼 기쁜 일이 또 있을까요?


아, 어쩌면 ‘전달’이라는 건 놀랍도록 ‘구원’과 닮아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특히나 ‘전달되는 것’을 다시 살려낸다는 점에서요. 죽으면 끝,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는 사실은 어쩐지 죽음이 유일하게 ‘나만의 것’이라는 인상을 주곤 하죠. 모든 것이 결국 죽음을 향해 달려간다는 사실을 우리 모두 너무나도 잘 알고 있는데도, 왜 ‘다시 살려냄’에 의미를 두는 걸까요?


아마도 ‘전달’이란 것, 혹은 ‘연결’이라는 것이 우리가 가질 수 있는 유일한 것이라 그런 게 아닐까요. 사실, 죽음조차도 한 개인만의 것이 아닙니다. 죽음은 잘게 쪼개져 살아 있는 사람들에게 나눠지는 것이니까요. 죽음을 전달하고, 기억을 전달하고, 마음을 전달함으로써, 나라는 씨실 사이에 날실이 얽히며 ‘우리’라는 직조가 완성되는 걸 떠올립니다.


그 와중에, 세월호 11주기를 기억합니다. 누군가가 이 일을 기억하고, 그 마음이 여전히 전달되는 것을 보며, 이 ‘전달’이 ‘전달되는 것’에게 닿는 하나의 구원이 되기를 바랍니다. 이 기억의 행위 하나만으로도, 당신 스스로를 구원하는 일이 되리라는 믿음을 품습니다. 호의의 아이러니는 받는 자보다 행하는 자를 더 구원하는 법이니까요.



언젠가는 또 새로운 태도를 갖게 되겠지요. 그리고 또 많은 것들이 잊히고, 또다시 새롭게 기억될 거라는 생각을 합니다. 흘러가는 대로 흘려보내고, 받아들입니다. 이 흐름의 태도가 지닌 장점은 언제나 ‘빈자리’가 존재한다는 점이 아닐까 싶어요.


‘지금은 여유 부릴 때가 아니다’라고 말하는 사회에게, 그 사회 속에 과연 ‘내 이름’은 있었을까 하는 생각도 해봅니다. 손가락을 집게 모양으로 만들어 왼쪽 가슴에 대어 봅니다. ‘내 이름은…’이라는 운을 떼며, 스스로의 존재를 인식합니다. 이 시스템은 내 이름을 기억하지 않겠지만, 나는 내 이름 안에 담긴 모든 연결을 떠올립니다. 모든 연결을 떠올립니다.


조금은 흐릿할지라도, 이제는 어떤 것들을 중요하게 여겨야 할지 어렴풋이 보이는 것 같습니다. 오늘도 잰걸음으로, 숨이 차지 않도록, 그러나 충만한 하루를 보내야겠어요. 그럼, 다음에 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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