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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면 우리의 미래는 작은 조각들일지도 몰라.

붕괴된 세상에서 보내는 편지

by 후기록

있잖아 요즘 난 우리 세대가 어디쯤 와 있는지를 자꾸만 생각하게 돼. 속도는 빨라졌지만, 방향은 더 불분명해진 느낌이라고 해야할까. 이제는 겉으로도 평온이란 것이 사치가 되는 것 같고 너무 많은 균열이 점점 더 뚜렷해지는 걸 느껴. 그 균열의 선명함을 바라보면서 나는 이런 생각을 하곤 해. 혹시 우리가 지금 살아가는 이 세계 자체가, 이미 아주 조용히 그리고 아주 깊게 실패한 것은 아닐까 하고 말이야.


그 실패는 어느 한 사람이나 세대의 잘못은 아닐꺼야. 아니 오히려 나는 더 오래된 구조와 선택들의 누적 결과라고 느껴. 자본주의는 발전은 분명했지만 (그것이 행복인지, 혹은 성공인지는 차치하고) 그 안에 들어가지 못한 사람들의 이야기는 늘 주변부에 있었다는 걸 요새 아주 크게 통감하고 있어. 성장은 이루어졌지만, 과연 그 달려나가는 속도가 모든 존재가 같았을까? 하고 말이야. 심지어 그 느린 존재들에게 여러 ‘악’한 이미지들을 부여하면서 말이야.

이제는 그 구조를 설계하고 지켜온 이들이 책임을 이야기해야 할 때라고 생각해. ‘정상’과 ‘비정상’을 나누는 사회적 기준을 정해온 문화를 누가 만들었는지를 생각 해. 그들이 어떤 제도를 만들고 어떤 가치를 우선해왔는지를 저울질 해보고 누가 배제 되었는지를 생각 해. 여성은 여전히 ‘침묵’해야 하는 존재고, 장애인에겐 ‘처리’비용이 드는 무언가 일뿐이고, 노인은 ‘노후 설계 실패’의 책임을 오롯이 개인에게 떠넘겨.

아이는 ‘미래의 주인공’이라면서도, 교육은 경쟁 중심이고, 보호는 통제의 형태를 벗어나지 못해. 심지어 그 마저도 사라져가고 있지. 맞아. 사실은 알고 있어. 이런 구조는 단지 실수가 아니라, 오랜 시간 정당화되어온 선택의 결과인걸.





난 이런 현실 앞에서, 우리가 정말로 실패한 세대라는 것을 인정하는 데 주저하고 싶지 않아. 그렇다면 이제 우리가 생각해봐야 할 건 그 실패의 책임이 누구에게 있는가? 그리고 누가 그것을 회피하고 있는가? 를 떠올려봐. 그런 중에 무엇보다 가장 무기력하게 하는건, 이 문제를 꺼내놓을 때마다 돌아오는 익숙한 반응이야. 더이상 이야기 하기를 귀찮아 할때 말이지.


“네 의견도 있을 수 있지.”


존중을 가장한 거리두기, 또는 ‘네 생각은 그냥 네 생각’이라며 이야기를 흐릿하게 만드는 회피 들. 차라리 분명한 반대 의견이 더 나아. 동의하지 않는다면, “나는 그 말에 동의할 수 없어”라고 이야기해줘. 그렇게 말해야, 네가 듣기 싫어서 거짓 존중으로 희석시킨 태도가 분명하게 존재하게 될테니까 말이야.


물론 나 역시, 이런 글을 쓰면서 과연 떳떳하냐고 물으면 나는 부끄러운 존재가 돼. 어떤 실격적인 존재처럼, 털어보면 잔뜩 흩날릴 티끌들을 아니면 거대한 오염들을 재인해.하지만, 그럼에도 중요한 건,

내가 가진 위치가 구조 안에서 어떻게 작동하고 있는지를 인식하고, 그 구조를 유지하려는 충동을 경계하는 태도 아닐까?


그래서 난, 저항이란 반드시 거창한 투쟁이 아니어도 된다고 믿어. 이런 의문과 생각에 질문을 포기하지 않는 일. 그리고 어쩌면, 정말 필요한건 믿음일지도 몰라. 극적 소수가 만들어내는 ‘악’을 걱정해 ‘평범하게 착한’절대 다수를 잃지 않는 것. 결국 세상은 선으로 밀려날 것 이라는 믿음 이라는 걸 잃지 않는 일 말이야.


그리고 난 이쯤에서 또 다른 상상을 해봐.

만약 지금의 세계가 실패했다면, 그 다음은 어디서부터 다시 시작할 수 있을까를 말이야. 나는 그 답이 소수자의 삶에 있다는 생각이 요즘 많이 들어. 권력을 가져보지 못한 사람들이, 권력의 부작용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사람들이, 시스템의 바깥에서 살아온 사람들만이 상상가능한 전혀 다른 세계를 떠올려.

우리가 다시 만들어야 할 미래는, 소외된 사람들을 이 실패한 세계에 ‘포용’ 시키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직접 ‘설계’할 수 있는 사회여야 한다고 나는 요즘 생각해. 그들의 언어, 그들의 가치관, 지금까지는 너무 낯설어서, 너무 불편하다고 여겨졌던 그 방식들이 실은 지금까지와는 다른, 새로운 발전의 세계를 열어줄지도 모르니까. 너의 미지근한 태도에서, 나는 이렇게 답할게. 이젠 이 시대가 실패했음을 인정하고, 그 실패가 끝이 아니라 전환점이 되기를 바란다고 말이야. 그리고 그 전환은, 더 이상 기득권의 언어로는 말해질 수 없을지도 모른다고 말이야.







너 역시 아마 여러 고민 속에 있겠지. 특히나 그 ‘생존’의 영역에선 더욱이나. 그럼에도 지금 이 세상의 모양에 대해, 정말 아무 말도 하지 않을 수 있겠어? 아니, 결국 아무것도 선택하지 않은 태도로 ‘그런 의견도 있을 수 있지’라고 어물쩡 회피 할 수 있을까? 다시 말하지만 내가 바라는 건 동의도 기계적인 평등도 아니야. 내가 바라는 건 ‘너의 의견’이란 걸 알아줬으면 해. 우리가 어떤 ’진정한 대화‘를 나누게 된다는 일에 대해서 생각해. 우린 분명 성공 할 수 있을거야. 반대쪽을 바라보더라도 결국 합으로 향하는 길을 찾는 걸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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