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고 지독해라, 이 첫사랑.
불이 꺼집니다. 어수선했던 분위기가 순식간에 정리되곤, 핸드폰을 보고 있던 사람들도 이내 급히 홀드 버튼을 눌러 그 어둠에 동참합니다. 이 공간의 안전 수칙들이 간단하게 소개됩니다. 그리고. 배급사와 영화사의 로고가 지나갑니다. 일련의 과정 중에 저는, 숨을 삼킵니다. 나름의 편안한 자세를 찾아 뒤척이는 중, 영상이 시작되고. 갑자기 밝아지는 화면에 눈이 시리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오프닝 시퀀스. 그렇게. 영화는 시작됩니다. 그렇게 저는, ‘새로운 세계’로의 2시간 남짓 타인의 인생을 경험합니다.
영화를 보는 일의 가장 처음의 기억은, 깊은 밤에 틀어주던 ‘주말의 명화’였습니다. 아직 초등학교도 들어가지 못한 미취학 아동에게 TV란 지금의 아이들에게 제공되는 유튜브와 비슷한 것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보기도 하고. 밥과 술을 파는 장사를 하는 부모님들은 아침에 나가 새벽에 들어오는 일이 일상이었기에, 주말의 낮은 놀이터에서, 주말의 밤은 거실에서 TV를 보는 게 일상이었어요. 케이블티비가 비싸다고 끽해야 열몇 개의 공영 채널을 졸린 눈을 비비며 몇 바퀴 돌리다 보면. 10시나 11시 남짓 즘, 웅장한 음악과 함께 떠오르는 ‘주말의 명화’ 타이틀을 봤을 때. 졸렸던 눈을 번쩍 뜨고 영화의 시작 전의 수많은 광고마저 즐기게 되는 기분이 들었습니다.
주말의 명화로 봤던 영화들은 기본적으로 애들 용은 아니었습니다. ‘에일리언’이라든지, ‘터미네이터 2’라든지 개중에는 ‘명화’의 카테고리에 넣을 수 있나 싶은 ‘로스트 인 스페이스’나 ‘이벤트 호라이즌’ 호러영화도 더러 있었고 말입니다. 그런 영화들 사이에서 나에게 처음으로 인상 깊게 기억되는 영화는 ‘바이센테니얼 맨’ 이였어요. 오프닝 시퀀스의 로봇이 조립되는 순간부터, 그 어린 나이의 나는 어떤 단어들이 어떤 감정을 나타내는지 잘 몰라서, ‘나는 이 영화를 사랑하게 될 거야’라는 문장을 떠올리지 못해 답답했던 기억이 나요. 영화의 내용은 로봇이, 감정을 배우고, 인생을 배우며, 결국엔 인간으로 인정받게 되는 ‘사랑’ 이야기를 보면서, 그 영화의 ‘200년’의 시간이 2-3시간 안에 압축된 모든 감정의 일생을 느꼈던 경험이 이 ‘영화’에 사랑에 빠지게 되는 계기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합니다.
결국 이 영화가 너무 좋아서, 삶의 어떤 기쁨, 행복, 슬픔, 좌절, 고난 등등의 기점에서 언제든 기꺼이 다시 한번 재생하는 영화가 되었습니다. 마치 그 로봇의 삶이, 내가 되었으면 하길 바라는 것처럼. 어떤 누군가에겐 책 한 권이 삶의 방향성이 되곤 하는 것처럼, 저에겐 그 ‘앤드루’의 삶의 태도가, 삶의 방향성이 되곤 했어요.
그 뒤로는 정말 쉬지 않고 여러 영화를 봤습니다. 피와 살점이 난무하는 살육극, 우주에서 일어나는 전쟁, 모든 게 현실이 되는 보드 게임판, 나 빼고 모든 게 거짓인 세상, 원시시대의 공룡이 현재에 나타나면 일어나는 일들 등등. TV는 곧 저에겐 창문이고. 그 창문을 통해 바라본 세상은, 기묘하고, 즐겁고, 때론 슬픈 ‘이야기’ 들이었어요. 이따금 너무 어려운 심벌리즘이 가득한 영화를 볼 때면 지루함을 느끼고, 흑백영화를 볼 땐 따로 자장가가 필요하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나는 영화 보기를 멈추지 않았고, 잠을 자더라도 영화를 보다가 잠이 든 저를, 새벽에 들어온 아빠가 안아 들어 잠자리에 뉘는 건 주말마다의 있었던 소중한 사랑의 추억이기도 합니다.
나이를 한두 살 먹자, 나에게는 ‘컴퓨터’라는 게 생겼고, 뒤이어 따라온 ‘인터넷’이라는 세계에선, 이젠 ‘누가 골라 준’ 영화가 아닌 ‘내가 고르는’ 영화들의 경험으로 채워나갔어요. 전 서계에서 내로라하는 명작들 하며, 그리 유명하진 않지만 소위 말하는 ‘컬트’의 영역에서 마니아의 숭배를 받는 영화들을 보기도 하고, 또 한편으론 폭력이 낭자하고 사람이 죽고, 그냥 죽기만 하면 다행이었을 그런 영화들을 보기도 하고. 스토리 연기 개연성 같은 건 내다 버린 영화라고 할 수 있을까? 싶은 것들도 보기도 하고. 감수성이 충만하다는 청소년 시기를 감각적, 자극적 할 것 없이 잡식성으로 뜯어먹으며 키워내면서, 정말로 ‘삶의 일부’가 되어버렸습니다. 아니, 영화가 나를 받아들여 줬다고 해야 할까요. 어쩌면, 정말 어쩌면 ‘영화’가 나를 키웠을지도 모르겠구나. 하는 그런 생각을 해볼 때도 있어요.
그 뒤로도, 영화를 좋아하는 일을 멈춘 적은 없습니다. 어쩔 땐 영화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모여서 모임을 형성하기도 하고, 글과 글이 아닌 모든 것에 관해 이야기하는 문예 집단에서 영화에 대한 이야기로 밤을 새우기도 하고요.
그러다 보니 언젠가 나에게 그런 영화를 ‘만들 기회’가 온 적이 있었어요. 대학교 2학년을 마치고 휴학하던 중이었습니다. 지역의 콘텐츠 교육을 목적으로 한 웹드라마를 제작을 지원하는 사업이었어요. 그때의 연인은 저에게 말하곤 했어요. ‘그렇게 좋아하면, 한번 만들어봐! 배우는 내가 할게!’ 무대와 뮤지컬 연극의 경험을 이제 다지고 있는 애인은 그렇게 말하곤 했어요. 그 말에 용기를 얻어 신청했고, 놀랍게도 ‘감독’ 포지션에 발탁이 됐습니다.
다만 저는 도망쳤어요. 꼴사납고 서툴러빠진 짝사랑이, 상대방을 마주했을 때처럼.
너무 사랑하는 것이 갑자기 다가왔을 때의 두려움을 분명 알고 있었음에도, 현실은 더 무서웠습니다. 그 일은 여태 이따금 생각나는, 내 삶의 비겁한 지점이기도 하고요. 그 일의 보상 심리였는지는 모르겠지만, 이후로는 계속 그 ‘만드는 것’에 겉도는 일들을 했어요. 광고 촬영을 하기도 하고, 무대를 만들기도 했고, 영상을 편집하는 일이나, 웨딩 사진과 영상을 촬영하는 일도 하고. 그럼에도 그것들은, ‘영상’의 카테고리였을 뿐. ‘영화’가 아니라서, 어느 순간 그 성마름이, 그 모든 행동이 ‘도피‘라는걸 깨닫고 마음을 갉아먹고 있다고 느꼈어요.
몇 년을 그렇게 지내다가 결국엔 일을 접게 되었습니다. 어느 순간 스스로에게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것. 그것이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만들었어요. 이후엔 2년의 도피성 공시 생활을 시작했습니다. 삶의 전진을 유예하면서, 영화를 보는 일마저도 놓아버렸어요. ‘공부’라는 핑계로 ‘아무것도 하지 않는’ 시간을 보냈습니다. ‘삶’에서 멀어지고 나니 ‘영화’와도 멀어졌어요. 그런 것들을 포기했으면 열심히 했으면 좋았을 텐데, 거짓말을 가리는 건 또 다른 거짓말인 것처럼, 떳떳하지 못한 시간을 보냈어요.
그럼에도 그 모든 일들을 지나 지금의 저는 글을 쓰고 있어요. 영화를 보는 일들은 마치 밀린 일을 처리하듯 수십 편의 영화들을 꾸역꾸역 먹으면서도, 그 고봉밥을 넘기는 일을 기꺼이 하면서, 그 매이는 목을 눌러 담아 글을 써내면서, 생각합니다. 아 나는 역시 ‘영화를 사랑한다.’라는 점을 말입니다. 그렇게 좋아한다고 이야기했던 시간을 보내다가, 부끄러운 좌절의 시간을 겪고 나서, 잠시간의 이별 시간을 가진 뒤, 다시 만난 영화는 여전히 수많은 이야기로 나를 다시 품어주었어요. 참 고마운 일입니다.
언젠가 우스갯소리로 꺼내보는 말이 있어요. ‘기영 씨는 뭘 좋아해요?’라는 질문에 ‘저는 영화를 좋아해요. 나를 키운 것은 8할이 영화거든요.’라고. 다만 생각해 보면 정말 그렇거든요. 저의 신체는 어떨진 몰라도, 영혼의 조각은 여러 ‘이야기’들의 모자이크로 이루어져 있는걸요. 그 모자이크 조각마다의 색의 스펙트럼이 지금의 저의 영혼의 색인걸요.
그리고 드디어, 이런 생각을 해보곤 해요. 너무 성급했던 내가 정말 ‘영화’에 닿을 뻔했던, 그 순간을 생각해 봐요.
그 아쉬움을 뒤로 얹고, 영화가 나를 여기까지 키워냈으니, 이젠 내가 영화를 태어나게 해보고 싶다고 말이에요.
트뤼포의 말 중엔 이런 말이 있어요.
“영화를 사랑하는 첫 번째 방법은 같은 영화를 두 번 보는 것이며, 두 번째 방법은 영화평을 쓰는 것이고, 세 번째 방법은 영화를 만드는 것이다.”
첫 번째 단계를 당연하게 해내고, 두 번째 단계를 기꺼이 하고 있는 지금, 이젠 세 번째 단계를 준비해야 할지도 모르겠어요. 지금까지 쌓아왔던 모든 것들이 등을 떠미는 것 같은 기분이 들거든요.
왠지 모를 익숙한 성마름이, 갈증이, 조금씩 생기는 듯하거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