확신의 맹점.
확신은 믿음의 적이다. 신비로움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믿음 역시 존재할 수 없다.
재밌게도 이런 멋진 명설교를 한 로렌스는 얼마나 대단한 이야기를 꺼내버린 건지 전혀 모르는 듯했어요. 마치 자기 자신이 말한 게 아닌 다른 누군가의 말을 대신 전달 하는 듯 이 말이에요.
갑작스러운 교황의 서거. 종교계는 엄청난 파도가 일어나기 직전입니다. 이런 상황에서의 프로세스를 따라서 추기경 단장인 ‘로런스‘는 콘클라베를 개회합니다. ‘벨리니’ ‘트랑블레‘ ’테데스코’ ‘아데예미‘등등 쟁쟁한 추기경들의 암투가 예정된 한편, 존재 자체가 비밀에 부쳐있던 ‘베니테스’ 추기경까지 이 암투에 포함, 모든 문이 걸어 잠기며 이 ‘콘클라베‘는 시작합니다.
개인적으로’종교‘자체에 대한 의문은 들지 않았습니다. 이 영화가 말하고 싶은 부분은 무언가를’믿다’에 있다는 생각이 들진 않더라고요. 특히나 첫 줄에 적어놓은 로렌스의 설교에서도 있듯, 이 영화는 ‘의심’의 가치에 관해서 이야기합니다. 영화의 전체적으로 현재 ‘교회’가 가지고 있는 커다란 쟁점들을 작게 만들어 영화에 배치해 두고 이를’의심’하여 ‘밝혀내는’ 과정이 영화 전체의 플롯이라고 할 수 있겠네요.
의심의 가치는 뭘까요? 우리는 의심하거나 받는 경우에 대해 기본적으로 거부감이 있습니다. 알 수 없는 것을 두려워하는 것은 인간의 본성이고, 의심하려면 진심이 숨겨져 있어야만 하니까요.
의심은 이렇듯, 어쩌면 ‘악‘을 대표하는 감정일지도 모릅니다. 다만 정말 그렇기만 할까. 이런 생각을 해봅니다. 확신만 존재하는 세상이라면, 우리는 그 어떤 것도 제대로 바라보지 못한다고, 확신이라는 명확해 보이는 감상에 속아 가능성을 배제한 ‘눈을 감은‘상태가 되어 버린다는 생각이 들곤 합니다.
(이하 스포일러)
이 영화는 그런 지점에서’고뇌‘하는 자를 긍정합니다. 대표적으로 교황 후보의 물망에 올라와 있으면서도 아 콘클라베를 관리하는’로렌스’의 경우가 돋보이죠. 심지어 이 로렌스가 본인의 역할을 ‘잘못된 확신’을 가지고 나아갈 때 신은 우레와 같은, 폭발적인 꾸짖음으로 일갈하는 듯합니다. ‘너의 역할은 그것이 아니다.’라는 듯이 말입니다. 조금은 강렬한 답일지 모르지만, 이 인물 중 하늘 위 그분의 뜻을 직접 내려받는 듯한 묘사는 로렌스에게만 있는 것을 보면 이 신은 참 고뇌하고, 의심하며, 고난을 걷는 자를 사랑하는 것 같습니다.
상기한 로렌스의 설교를 다시 가져와 봅니다. 모든 추기경 후보 몰락의 지점은 전부 확신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용서받을 거라는 확신, 아무도 모를 거라는 확신, 과거로 돌아가야 한다는 확신. 이 모든 확신의 결과는 고뇌하는 자들의 의심을 통해, 그의 고행을 통해 이루어집니다. 아데예미의 추문은 그가 숨겨온 한 여성에 의해서, 트랑블레의 불법행위는 로렌스와 수녀원장에 의해서, 작중 가장 거대한 안타고니스트로 존재하는 테데스코의 정치는 그 누구도 존재를 몰랐던 베니테스에 의해서 말입니다.
로렌스의 이 의심을 이끌어주는 자들의 행동들도 꽤 흥미로웠습니다. 죽기 직전 각별한 사이였던 교황도, 봉인을 풀고 교황의 방에 들어간 것을 눈감아 주고 변호해 준 수녀원장도, 그를 그저 온전히 ‘고민하는 자‘라서 지지해 준 베니테스도 말입니다. 마치 그가 그 의심을 통해 무언가의 깨달음에 도달하도록, 그래서 옳은 길을 선택하도록 이끌어간다는 느낌을 받았어요. 그리고 그렇게 결정된 이 영화의 마지막이, 이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올바른 방향’인가 보다.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교회는 아주 느리고 단단한 곳이지만, 느리고 단단한 거북이도 항상 벽을 넘어 도망치는 것처럼 교회도 각 교황 후보로 대표되는 여러 문제점을 이겨내고 다양성을 위해 나아갈 수 있다고 하듯 말입니다. 그 모든 악을 쳐내고 남은 ‘이노센티우스’를 찾아낼 수 있다고 말입니다.
본디 콘클라베의 폐회는 굴뚝에 하얀 연기가 피어오르는 것으로 ‘선출됨‘을 알리고 마무리됩니다. 그 하얀 연기를 대신해서 자신의 사명을 완수한 로렌스의 눈에는 세 명의 흰옷을 입은 어린 수녀들이 눈에 비칩니다. 이 영화가 교회 안쪽의 여성 역할을 강조하고 있음에는 틀림없어 보입니다. ‘본디 보더라도 보지 않은 듯, 알더라도 침묵해야 하는‘ 수녀의 본분을 이야기하면서도, 최악의 결과를 피하는 데에 가장 큰 역할을 한’수녀원장‘의 존재감에 대해서도 베니테스의 ‘수녀들에 대한 감사’를 담은 기도에 피식하고 웃음을 흘리는 모습을 보면, 어쩌면 이 영화에서 신, 교황, 그리고 그녀만이 모든 내막을 알고 있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러한 여성의 힘에 ‘느리지만 변화할 것’이라는 답으로 ‘간성’의 베니테스를 제시합니다. 그의 성 정체성은 아마 그 세계관의 교회에선 큰 논란이 되겠지요. 물론 세상에 드러난다면 말입니다. 새로운 교황 이노센티우스에게 당사자성을 기대할 수 있을까요? 잘 모를 일입니다. 다만 그는 자기 이름처럼 순수한 믿음을 가지고 있는 듯합니다. 이미 너무 많은 의심을 거쳤기에 말입니다.
이 엔딩의 부분에 대해선 논란이 있을 수도 있겠습니다. 특히나 결국 ‘정체를 숨기고’ 얻어낸 부분이라는 점에서 불만의 여지가 있다곤 생각이 듭니다. 하지만 우리는 의심을 통해 진실에 가까워질 순 있어도 결국 ‘모든 걸 알 수는 없는‘인간 일뿐입니다. 그 지점에서 우리는 모두 얼룩 하나 없는 인간인 점일 테고요. 무엇을 지켜내는가. 역시 중요한 부분일 수 있지만, 어쩌면 또 한편으로는 ‘어떻게 나아가야 하는가?’를 생각할 때도 있지 않을까요.
콘클라베는 그런 부분에서 참 좋았습니다. 배우들의 열연, 장면과 음악의 경이로운 조합. 묘한 코미디들까지 더 해서 이번 아카데미 화제 작중에 단연 좋은 작품이었다고 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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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에 미신이라는 주제를 빌려 믿음과 의심에 대한 글을 썼었는데 꽤 좋은 자극이 된 영화네요. 여러모로 추천해 드립니다. 가볍게 보셔도, 무겁게 보셔도 좋아요. 특히 끊임없이 ‘의심’하며 보면 너무 즐거울 영화. 콘클라베였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