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태어나 봤자 넌 나약한 존재야.
멘 (2022) - 알렉스 가랜드
폭력은 변하지 않는다. 단지 모습이 바뀔 뿐.
※ 이하 스포일러 주의
이혼을 애원하는 관계가 있다. 여자는 말한다.
이혼하지 못하게 자살로 협박하는 게, 이혼해야 할 이유라고.
남자는 여자를 후려치고, 여자는 그를 내쫓는다. 그리고 남자는 목숨을 끊는다.
폭력은 그 방법, 대상, 가해자의 종류에 따라 다양한 형태로 나타난다.
크게 나누자면 두 가지다. 하나는 육체를 무너뜨리는 폭력, 다른 하나는 정신을 무너뜨리는 폭력.
이 두 가지를 묶는 공통점은 결국 상대를 자기 뜻대로 만들기 위한 수단이라는 점 아닐까.
주인공 하퍼는 여러 폭력의 그림자를 등에 지고 휴식을 위해 시골로 향한다.
그곳은 아름다웠지만, 천국은 아니었다.
곧 발가벗은 남자의 존재가 등장하면서 분위기는 급격히 전환된다.
이 영화에서 가장 인상적인 설정은, 등장하는 모든 남자들이 같은 얼굴을 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들은 각기 다른 형태로 하퍼를 압박한다.
1인 다역이라는 설정은 꽤 흥미롭다.
다만 하퍼는 이 기이한 연출을 알아채지 못한다.
관객과 캐릭터 사이에 생기는 정보의 차이에서 오는 묘한 긴장감이 흥미롭다.
이런 연출이 가능하다는 점에서 재미를 느꼈다.
비슷한 경험을 줬던 영화로는 ‘서스페리아 리메이크’가 떠올랐다.
아마 하퍼에게는 전부 다른 사람으로 보였을 것이다.
혹은, 그들의 얼굴은 하퍼에게 중요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이야기에서 관심을 바라는 것은 하퍼가 아니라,
하퍼를 깨부수더라도 어떻게든 주목받고 싶은,
그 ‘같은 얼굴을 한 다른 존재들’이다.
하퍼는 영화 내내 고통받는다.
가스라이팅과 물리적 폭력에 시달리며,
그중 하나는 그녀의 집에 침입해 팔을 찢긴다.
이후 등장하는 소년도 같은 상처를 지닌 채 나타나,
가소로운 죄책감을 지우는 말들을 내뱉는다.
성직자 역시 같은 상처를 지닌 채 등장하고,
하퍼에게 성적 매력을 탓하며 강간 직전까지 몰고 간다.
기구한 하퍼. 하지만 그녀는 이들의 숨바꼭질에 휘둘리지 않는다.
숨지도 않고, 도망치지도 않는다.
성직자의 배에 칼을 꽂아 넣는 하퍼.
이후 추격전 끝에, 몸이 망가진 ‘무언가’는 추격을 멈추고
숨겨진 실상을 드러내듯 기괴하게 부풀어 오른 배에서 연쇄 출산을 시작한다.
출산의 반복 속에서 이전의 남자들이 모습을 바꾸며 다시 태어나고,
하퍼에게 매달린다.
하지만 하퍼의 표정은 그 추태가 반복될수록 점점 차가워진다.
그리고 마지막, 남편의 모습이 등장했을 때 그는 말한다.
그녀에게 원하는 건 단 하나, 그녀의 사랑이라고.
어떤 관계는 아무리 노력해도 파괴적이고 소모적이다.
고통과 집착의 연쇄에 빠져 삶을 피폐하게 만든다.
사랑이라고 믿으며 스스로를 끝없이 괴롭히는 관계.
“남편이 무서워.” 하퍼가 친구에게 보낸 메시지를 억지로 다시 읽게 만들고,
“나도 네가 무서워.”라며 그 책임을 그녀에게 돌리는 남편.
계속해서 스스로를 의심하게 만드는 말들.
이건 가스라이팅이다.
하퍼의 얼굴을 후려치는 그 남자는,
이미 깨진 그릇에 사과를 얹는다.
너무도 기만적이고, 너무도 가소롭다.
그런 사과는 결국 자기 자신을 위한 것이다.
그녀를 붙잡아두고 싶은 욕심의 표현일 뿐.
그런 싸구려 자위에 애처로움 같은 건 없다.
하퍼의 싸늘한 표정은, 연쇄 출산의 끝에서 남편이 진심을 털어놓을 때까지도 변하지 않는다.
그리고 친구가 찾아와 그녀를 마주하기 전까지도 그 표정은 그대로다.
친구가 찾아왔을 때, 하퍼는 비로소 웃는다.
하퍼가 웃는 장면은 단 두 번이다.
시골집에 도착한 다음 날, 숲을 산책하다 비를 맞았을 때.
그리고 모든 일이 끝난 후, 친구가 그녀를 찾아왔을 때.
그녀는 아마 해방감을 느꼈을 것이다.
혹은 폭력의 본질을 직면했기 때문일지도.
폭력은 계속 자기 자신을 낳는다.
형태만 바뀌는 그 폭력은, 갓난 아이만도 못한 유약함을 드러낸다.
하퍼는 그 가소로운 본질을 반복해서 목격하며,
더 이상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는 걸 깨달았을 것이다.
아무튼, 재밌었다. 무엇보다 보는 맛이 있는 영화였다.
음악도 훌륭했고.
알렉스 가랜드 감독의 영화는 여러 번 봐도 좋다.
대표적으로 ‘서던 리치’, ‘엑스 마키나’ 같은 작품들.
좋아하는 감독 리스트에 하나 더 추가할 수 있어 기뻤다.
앞으로의 작품도 기대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