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 설화 다시 쓰기.
빛이 없다. 소리도, 냄새도, 방향조차. 한은 오랫동안 자신이 깨어 있는지 아니면 자고 있는지조차 알 수 없었다. 눈을 감은 것도, 뜬 것도 아닌 상태. 감각이란 게 여전히 남아 있다면 그건 단지 ‘무언가가 없다’는 사실뿐이다.
‘완벽한 공허…’
한은 손을 들어 올리려 했지만 손이 어디 있는지 알 수 없다. 몸이란 게 정말 존재하는 것인가? 한은 여전히 생각을 이어갔지만 의식은 깜빡거리고 희미하다. 시간은 수증기를 만지듯 몇 분인지 몇 해인지 헤아릴 수 없다. 문득, 그가 기억해 낸 것은 사고 직전 들려온 마지막 음성이다. 짧고, 떨리던, 비명에 가까운 찢어지는 목소리.
“한! 나를 잊지 마! 절대 잊으면 안 돼!”
한은 그 문장을 수백 번, 수천 번 재인한다. 마치 그 문장을 잊으면 자신이 사라질 것처럼. 마치 이것을 기억하는 일이 자신의 존재에 닻을 내리는 것 일인 것처럼. 자신이 ‘그녀를 잊지 않는 존재’로 남아 있는 한, 이 텅 빈 ‘비다’라는 개념조차 없는 이곳에서 자기의 존재를 증명할 수 있을 것처럼.
어쩌면 한은 이미 오래전 죽었는지도 모른다. 아무것도 없는 곳에 혼자 존재하는 일은, 의미가 없다는 것을 생각한다. 관계 사이에서 존재하는 인간의 한계에 대해 생각한다. 이 한계에 죽음이 있다면. 그리고 그 죽음이 끝이 아니라면, 이렇게 부유하는 의식을 우리는 뭐라고 부를 수 있을까.
‘인’
소리조차 없는 공간에서 한은 이름을 떠올린다. 생각조차 존재하지 않지만 한의 마음은 분명 그 이름을 향했다. 수천 겹의 공허를 헤매며 그 이름 하나를 단단히 고정한다. 시간도, 정신도, 육체도 그 어떤 곳도 정을 박을 기반이 되지 못하는 이 공간에서 그것만이 한의 유일한 닻이다.
‘한, 계속 나를 떠올려. 머지않았어’
그녀의 목소리가 다시 들리는 듯했다. 아니, 그것은 그가 만들어낸 환상이었을지도 모른다. 분간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 말이, 그 다정하고도 선명한 말이 한을 붙들고 있는 유일한 실마리다.
“나도 널 기억하고 있어. 그러니까 내가 널 찾을 수 있어.”
한은 이 말을 아직 들은 적 없지만, 그것은 분명 그녀가 전해주고 싶었을 마음이다. 어둠 속에서, 이름 없는 공간에서, ‘존재하지 않는’ 공간에서. 한은 그 말을 되뇌며 생각한다. 너를 떠올리는 게 나를 구할 수 있을까. 너에 대한 기억이 나에게 닿을 수 있을까. 이 구조 신호가 시간의 경계 너머까지 도달할 수 있을까.
그리고 그는 모든 것이 멈춘 그곳에서
생각한다. 기억한다. 재인한다. 떠올린다.
한 번, 또 한 번. 잊지 않기 위해.
그 순간의 절망감을 떠올릴 때마다 인은 집어던져진 도자기 인형처럼 산산조각이 났다.
분명 모든 것이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모든 계산은 완벽했다. 모든 안전 수칙은 지켜졌다. 단지 실수라면 ‘인간이 닿아선 안 되는 지식’을 탐한 오만뿐이었을 것이다.
한이 게이트를 넘으려는 순간 일렁이던 게이트, 바닥을 울리던 미세한 진동, 그리고 끝없는 어둠이 한을 삼켜버리기 직전 인은 본능적으로 소리쳤다.
“한! 나를 잊지 마! 절대 잊으면 안 돼!”
인 자신조차 의미를 알 수 없었을… 그녀의 과거 현재 미래를 아우르는 아직 관측되지 않았을 가능성의 밑바닥에서 끌어올린 외침. 그녀는 외쳤고, 한은—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보았다. 짧은 시선이 오갔다. 모든 마음이, 어쩌면 한 우주가, 그 사이 그 찰나 바로 그곳에 담겨 있었다.
한은 입술을 움직였지만, 소리조차 빨려 들어가는 듯 그 공허 속으로 사라졌다. 그리곤 어둠이, 한 방울, 또-옥. 하고 방울져서 파문을 만들었다. 한의 모습이 마치 그가 있던 테두리대로 세계가 통째로 도려내진 듯, 한이 서 있던 세계가 게이트 안으로 빨려 들었다.
사고 직후 인은 연구소 통제실 앞을 떠날 수 없었다. 수십 번, 수백 번 데이터를 되감으며 그 짧은 순간의 무언가를 붙잡으려 했다는 사실이 그날의 기록으로 선명히 남아있었다. 한이 사라진 직후, 게이트는 폐쇄되었다. 그 진입 좌표는 뒤틀려 버렸다. 위험성을 감지한 후원자들은 자금을 끊었고 어떤 연구자도, 모험가도, 그 무엇도, 다시 그 안으로 들어갈 수 없었다.
어떤 수치도 변하지 않는 모니터 앞에 앉은 채 그녀는 생각했다. 그를 설득하지 않았다면, 그가 게이트 앞에 서지 않았을지도 모른다며… 그 어떤 문제도 없었던 상황에서, 가장 쉽게 찾을 수 있는 원인은 스스로임을 잊은 채. 끊임없이 죄책감을 되새김질했다.
“내가 들어가는 게 맞아. 넌 여기 남아서, 이걸 지켜야 해.”
한은 언제나 그런 사람이었다. 가장 큰 위험을 자신의 몫으로 떠안아야 두 발을 뻗고 누울 수 있는 그런 사람. 그 말이, 그 웃음이, 지금은 그녀의 심장을 바위보다 더 무정하게. 딱딱하게 굳어서 쩡-하고 금이 가는 소리가 울리게 만든다.
그는 사라졌고, 그녀는 남았다. 그녀를 미치게 하는 건 그것만으로 충분했다. 게이트에 도려내진 건 한뿐이 아니었다.
게이트 사고 직후 14일 경과.
어슴푸레 달빛이 내리는 어느 날 밤안개가 짙게 깔려 있었다. 밝고도 어두운 새벽, 연구소의 비상 채널에 신호 하나가 도달했다. 인은 몽롱한 정신으로 이 신호가 현실인지 꿈인지 분간하지 못했다.
“…인…!”
노이즈가 심하고 목소리는 왜곡되어 있었지만 분명했다.
“…ㅇㅣ… 기억ㅎ…ㅐ…”
“시간이… 여기… 이상해. 하지만 너를…. 아직… 너를…”
.
.
.
한이 살아 있다.
인은 본인을 짓누르던 절망과 죄책감의 무게 아래에서, 겨우 다시 숨을 내뱉었다. 한이 살아있다는 것. 그 이유면 충분했다. 그 순간부터 인은 다시 연구를 시작했다. 이건 단지 구조의 문제가 아니었다. 그의 시간은 무너졌고, 그녀의 시간은 계속 흘렀다. 그들은 다른 시간. 아니 어쩌면 다른 차원에 있었고, 연결되려면 더 이상 ‘이미 실패한’ 물리적인 요소들에 의지 할 순 없었다. 그 이상의 모든 것이 한 방향으로 -마치 바닷가의 모래밭에서 정확히 특정된 단 하나의 모래알을 골라내듯- 모든 변수가 수렴해야만 했다.
인은 처음으로 자신이 한을 위해 살고 있다는 것을, 그리고 그가 자신을 기억하고 있다는 사실이 자신을 다시 살아가게 만들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한이 보낸 그 짧은 메시지, 그 한마디가, 그녀를 모든 어둠에서 건져 올렸다.
그녀는 모든 공식을 다시 재정리하기 시작했다. 투자자들을 다시 설득했다. 자금을 조달했다. 단지 이 모든 과정에서 삶의 유일한 목적.
‘한의 구조’만큼은 자신의 마음 깊숙하게 숨겨 놓은 채.
처음엔 시간의 흐름을 느꼈던 것 같기도 하다. 그래도 당시엔 ‘원래 세계’의 법칙을 아직 기억하고 있었으니까. 손끝으로 쓸어도 쓸리지 않는 공기 속에서, 한은 자신이 헤엄치고 있다… 아니 그저 떠오르고 있다는 느낌만을 감각한다. 빛도 없고, 소리도 없고, 끝도 없는 그 속에서.
얼마만의 시간이 지났을까. 언젠가부터 그는 시간의 단위조차 잊었다. 며칠? 몇 달? 몇 해? 그 모든 말들이 이곳에선 무의미하다. 시계가 없다. 배고픔도, 피로도, 심지어 졸음도 없다.
그 어떤 감각 통로로도 느낄 자극이 없다는 사실만이, 한 에게 유일하게 허락된 ‘감각’이다.
의식만이 남겨진 이 이상한 공간. 그는 처음엔 이 세계를 ‘기이한 실험장’이라 여겼지만, 결국 시간이 조금 더 지나면서는 여기를 지옥이라 부르기 시작한다. 그리고 시간이 더 지나고 나선 결국 인정한다. 여기는 ‘지옥이라는 이름마저 존재하지 않는’ 그런 텅 빈 곳이라는 것을.
무게감 없는 몸을 저항 없이 흐르게 두며, 그는 자신에게 말을 건다.
“떠올려야 해. 인은 어떻게 웃었지?”
“그러고 보니 전날 밤 당신은. 말없이 창밖을 보고 있었지. 늘 불안할 때마다 그랬어.”
“우리 사이의 정적을 참 잘 견뎌내는 사람이었는데.”
이젠 그녀에 대한 기억만이 남는다. 한은 더 잘 떠올리기 위해 눈을 감는다. 기억은 상상이 되고, 상상은 시각이 된다. 그리고 시각은… 지독한 아주 지독한 그리움이 된다. 한은 벽 없는 방 안에서 끊임없이 혼잣말을 꺼낸다. 그것 말곤 할 수 있는 게 없었으니까. 그녀가 좋아했던 노래를 중얼거린다. 그녀 얼굴을, 솜털 하나하나의 위치까지 떠올릴 정도로 수없이 떠올린다.
게이트 사고 직후 13년 경과.
잔이 부딪치는 소리가 파티의 공기를 진동시킨다. 짠- 화려한 조명, 빛나는 천장, 황금으로 장식된 샹들리에, 고급 드레스를 입은 사람들과 빛나는 웃음들이 향하는 시선의 끝엔 ‘인’이 있었다. 바로 지금, 세기의 천재 과학자 ‘인’의 업적을 기념하는 파티가 시작됐다.
행성 간 통신 시스템의 완전한 정립… 지구 대기 변화 예측 AI의 완성… 무중력 환경에서도 자가 순환이 가능한 생태계 구조 설계 등등… 그녀의 연구는 인류를 다음 단계로 이끌었다. 박수 소리는 끝이 없었고, 정치인들은 줄지어 다가와 손을 내밀었다. 수많은 사람이 이젠 그녀를 알았다. 그리고 그녀에겐 ‘인류의 구원자’라는 명성이 붙었다. 다만 그 누구도 그녀의 눈동자 속 공허함을 보지 못했다. 그녀가 누구를 구하지 못했는지조차 사람들은 잊어버린 것처럼 행동했다.
“교수님, 정말 대단하세요. 이건 말 그대로 혁명입니다.”
그녀의 곁에 다가온 남자가 잔을 높이 들며 웃었다. 젊고 야심 있는 정치가였다. 금발의 벽 안, 다부진 몸매. 매끄러운 피부엔 고급 향수를 들이부은 것처럼 그에겐 화사한 향이 존재 증명처럼 뿜어져 나왔다. 그는 그녀의 연구 자금을 후원하는 위원회의 핵심 인물이었다.
“당신조차도 이젠 무시할 수 없어요. 세상이 당신을 필요로 하는 것을. 앞으로도 말이에요.”
“하지만, 당신에게 더 개인적인 시간도 필요하지 않을까요? 이 밤이 끝나고 나면, 둘만의 대화를 청하고 싶은데요. 당신이 그리는 미래는 어떨지, 알고 싶어요.”
인은 조용히 그를 바라봤다. 그의 눈빛은 진심이었다. 어쩌면 세상을 빛으로 이끌고, 그리고 그 자신이 꿈꾸는 미래에, ‘인’마저 구원할 수 있을 거라는, 확신이 느껴지는 눈빛. 그리고 태도. 그 누구도 쉬이 반할 아우라였다.
하지만 인의 마음엔 오직 하나의 이름만이 떠올랐다.
그녀의 목소리는 조용했다. 그녀의 마음엔 이미 돌처럼 굳어 금이 가버린 심장뿐이었다. 어느 시간 선, 어느 차원에서 ‘자신을 기억하는 누군가’의 파장을, 그 가능성을 인은 아직 놓지 않았다.
“죄송해요. 저는 아직,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어요.”
그 역시 인의 서사를 모르는 것이 아니었기에, 남자는 씁쓸한 표정을 지었지만 이내 웃으며 물러섰다. 고개를 약간 숙이며 ‘자신의 무례’를 인정하는 예의 바른 태도였다.
인은 다시 샴페인 잔을 들었다. 하지만 그 속의 거품은 텅 빈 허공을 닮아 있었다. 하지만 그 허공에 무엇도 담을 수 없었다. 아니 무엇을 담아도 채울 수 없음을 스스로 알고 있었다.
인은 밤늦게까지 홀로 남았다. 회장에는 쓰다 남은 음식이 널브러지고 조용한 음악만이 떠다녔다.
인은 조용히 창문을 열고 밤하늘을 바라봤다. 달은 크고, 멀었다. 우주는 그보다 더 멀다. 다른 차원은 그보다 더 멀 것이다. 몇 겹의 공간, 시간, 차원, 세계, 우주… 다음을 벗겨내면 그다음, 바로 그곳 어딘가에 한이 있을 것만 같았다.
그녀는 눈을 감았다. 자기 손이 이 세계를 바꿨지만, 그 손이 사랑하는 이를 저 너머로 밀어냈다는 사실은 절대로 바뀌지 않을 그녀 마음의 유일한 생존의 이유이면서도 끝없이 그녀의 숨을 옥죄었다.
“한! 나를 잊지 마! 절대 잊으면 안 돼!”
그녀가 마지막으로 외친 말. 그건 절규였다. 한 사람의 존재를 되찾기 위한, 한 존재가 잊히지 않기를 바라는 간절한 기억의 울림으로, 그 말은 여전히 인의 주변을 떠돌았다.
그녀는 매일 밤, 그의 이름을 부르며 잠들었다. 그의 목소리를 상상하며 아침을 맞이했다. 사람들은 그녀가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연구를 한다고 생각했지만, 그 모든 연구는, 그를 향한 연구였고 인류에 대한 영향은 그 집념의 낙수 효과일 뿐이었다.
컴퓨터 앞에 앉은 그녀의 눈동자는 늘 젖어 있다는 사실을 그녀와 함께 일해온 동료 연구자들은 알았다. 하지만 누구도, 그 눈물을 ‘약함’이라 부르지 않았다.
공간은 무한했고, 그 안에 부유하는 감각은 모든 방향으로 퍼져 있었다. 위도 아래도 시간도 감정도 무너져 내린 이곳. 그는 자신의 신체가 무한히 확장하는 것을 느낀다. 끝없이 퍼져가며 옅어지는 자신의 입자들을 느낀다.
그는 게이트의 내부에 완전히 흩어져 있었다.
살아 있다는 말이 의미를 가질 수 있을까? 심장은 이미 무한히 확장해 뛴다기보단 ‘파동’ 그 자체로 움직인다. 그 파동에 따라 모든 세포가, 모든 양자가 아주 천천히 느리게 느슨한 연결을 유지하며 조금씩 그 간격을 벌리며 멀어진다. 한은 이쯤에서 생명이란 자각을 잊어버린다. 단지 아주 희미한 ‘존재한다.’만이 유일한 실감이다.
빛도 어둠도 없는 공간. 자신이 어디서 왔는지, 어디를 향해 가는지도 모르는 채.
모든 감각은 특정 지점을 중심으로 아주 느리게, 느리게 퍼져나간다.
‘인…’
그 이름 하나가 그의 유일한 중심이다.
“나를 잊지 마.”
그건 절규도 절망도 아니다. 그건 신호다. 그 신호는 공명처럼 한의 의식 깊숙이 파고들었고,
그곳에 기억의 씨앗을 남긴다.
한은 ‘인’을 떠올린다.
피곤한 얼굴로 실험실 책상 위에 엎드려 잠들던 밤.
‘나와 닮은 사람’이라 불러주던 기적 같은 순간.
웃음과 더해 아끼던 차를 꺼내주던 새벽.
고백이 수줍게 전달된 날.
가지고 있던 습관.
자주 짓는 표정.
뻗어온 손.
얼굴.
눈.
점점 모든 게 흐릿하고 무형해진다. 그럼에도 그녀의 존재만이 한이 부서지지 않게 붙잡는다.
그 순간, 공간의 한구석에서 미세한 반응이 인다. 빛 같기도, 파동 같기도 한 무언가가 그의 곁을 스친다. 그리고 그 속에서, 그는 인을 봤다.
투명한 실루엣에 마치 오로라처럼 흔들리는 빛의 결들 속에서, 그녀의 존재가 나타난다.
“한.”
그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는 자신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심지어 과거의 것이 아니라 지금의 것이었다. 공허를 뚫고 도달한 살아 있는 울림이 드디어 한 이외의 존재로서 이 공간에 생성된다. 그는 숨을 멈춘다. 이미 멈춰버린 몸의 숨이 아닌, 마음의 숨을.
그녀는 그를 바라보며 손을 내밀었다. 그 순간, 한은 이 공간에서 처음으로 이동의 방향을 감지했다. 막연하고 무의미했던 부유의 흐름 속에 작은 좌표가 생겨났다. 연결. 이 공간에 유일하게, 하지만 절대적으로 필요했던 것은, 바로 그 연결이었다.
인이,
자신을 부르고 있다.
그녀가,
자신을 기억하고 있다.
인의 기억이, 자신의 존재를 우주 안 어딘가에 고정해 주고 있었다. 인은 조심히, 그의 팔을 잡아당겼다. 이리저리 흩어진 한의 입자가 다시 ‘한’으로 모이기 시작했다.
빛은 점점 또렷해졌고, 한은 그 개념조차 잊어버린, 출구라는 감각이 마침내 형체를 이루기 시작했다.
게이트 사고 직후 60년 경과.
여전히 세상은 인의 이름으로 떠들썩했다. 무형 에너지 전환 시스템… 위상이동 방정식… 행성 간 간섭 최소화 장치… 그녀가 이룬 업적은 물리학을 다시 썼고, 인류는 그녀가 바꾼 궤도 위에서 새로운 르네상스가 열렸다.
하지만 인은 점점 세상과의 교류가 줄어들었다. 강연도 인터뷰도 줄였고, 점차 외부와의 접촉을 끊었다. 언론은 그녀의 은둔을 ‘구원자의 안식’이라 불렀지만, 그녀는 전혀 안식과는 거리가 먼 일들을 준비하고 있었다.
언젠가 그녀에게 질문을 가진 이가 있었다. 야심이 빛나는 젊은 과학자. 그는 말했다.
“이제는 그만 잊어버려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녀는 웃지 않았다. 하지만 눈이 아주 잠깐 떨렸다.
“내가 그를 잊는 순간 나는 사라질 거야. 그러니, 그런 말은 하지 말게. ”
그는 사그라드는 노인의 말을 이해하지 못했지만, 더 묻지 않았다. 세상엔 증명되지 않더라도 존재하는 것들이 있다는 걸 인과의 협업을 통해 젊은 과학자는 이미 잘 알고 있었으니.
그날 밤, 인은 오래된 데이터 하나를 열었다. 60년 전, 한이 실종된 날의 영상. 모든 장면이 희미한 노이즈와 함께 반복됐다. 그리고 마지막 장면, 게이트 폭주 직전 그녀가 외쳤던 말.
“한! 나를 잊지 마! 절대 잊으면 안 돼!”
그 말이, 정말 도달했을까. 그의 귀에 닿았을까.
그녀는 종종 그 장면을 보며, 혼자 중얼거리곤 했다.
“어쩌면… 기억이… 신호가 될 수 있을까?”
그녀는 생각했다. 그리고 결정했다. 그녀는 더는 기다릴 수 없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 더 이상 기다리는 시간이라는 것마저 자신에게 허락되지 않을 것이라는 걸. 끝이 다가오고 있다는 것을. 지금 바로 자신에게 필요한 것을 인은 알았다.
다음 날, ‘인’은 사라졌다. 그녀의 거주지는 텅 비어 있었고, 통신도, 신호도, 계좌도, 모든 정보가 사라졌다. 전 세계가 그 실종을 두고 떠들썩했다.
‘자발적 증발인가?’
‘또 다른 실험인가?’
‘신의 경지로 넘어간 것 인가?’
하지만 아무도 몰랐다.
그녀가 어디로 갔는지. 무엇을 위해 사라졌는지.
단 한 사람. 그 젊은 과학자를 제외하곤.
게이트 사고 이후 ????년.
한은, 인의 홀로그램을 따라 지구로 귀환했다. 게이트를 지난 후 그가 처음 맞닥뜨린 것은, 무엇인가 존재했다는 사실만 느낄 수 있는 폐허와, 그곳 가운데 높이 솟은 돌기둥이었다.
“한.”
그녀의 목소리가 들렸다. 하지만 그곳엔 아무도 없었다. 이내 천장이 갈라지며 빛의 줄기가 쏟아졌다. 벽면의 패널 위로 광학이 교차했고, 마침내 피어오른 먼지 섞인 공기 중에 윤곽이 맺혔다. 인이었다. 어쩐지 숨소리까지 느껴질 듯 섬세했지만, 단지 빛으로 이루어진 존재로서 거기 나타났다.
“인? 이게 대체…?”
“응. 어서와 한… 귀환을 축하해…”
한은 가까이 다가섰다. 손을 뻗었지만 닿지 않았다. 인은 한이 기억하는 그대로 웃으며 말했다. 여전히 아름다운 그녀였다.
“당신이 나를 기억해 줘서, 구출할 수 있었어.”
“기억?”
“사고 당시, 게이트는 당신을 ‘세계’째로 찢어 삼켜버렸어. 이후로 공간은 닫혔고, 시간은 무한히 흘렀지. 하지만 당신이 나를, 그 게이트 속에서도 계속 기억하고 있었어. 당신의 뇌파, 신호, 흔적. ‘주기적으로 반복‘되는 그 신호. 당신이 존재한다고 보내는 그 신호. 그게 실처럼 나를 이끌었어.”
그녀는 고개를 들었다. 투명한 광학의 눈동자 너머로, 먼 옛날 그 눈빛이 겹쳐 보였다.
“그래서 찾아냈어. 무한대의 가능성 속에서, 단 하나의 너를.”
한은 아연했다. 생환의 기쁨 이전에 자신이 서있는 이곳이 어떤 곳인지 조차 감을 잡을 수 없었다.
“인, 대체 얼마나 시간이 지난 거지?”
인의 대답은 없었다. 대신 홀로그램이 번쩍였다. 파열음처럼 삐걱거리는 빛의 틈이 인의 목소리를 따라왔다.
“내게 남은 선택은…. 그리 많지 않았어, 시간은 그렇게 상냥하지 않아서…”
방 한가운데 있던 돌기둥이 크게 진동했다. 두껍게 쌓인 적층이 탈각되자 보인 바위라고 생각한 그것은 거대한, 기계장치였다. 요란한 소리를 내며 몇 겹으로 싸인 패널 너머의 공간이 열렸다. 거기엔 금속 신경망과 고리처럼 얽힌 회로, 그리고 한때 인간이었을지도 모를 회백질의 뇌가 들어 있었다.
그녀는 스스로를 생체 컴퓨터로 개조했다. 자신의 정신을, 오직 ‘한’을 다시 만나기 위한 연산을 무한히 반복한 것이다.
“드디어…. 당신을 만…만난…만…난 거…야.”
홀로그램이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빛이 갈라지고, 인의 형체는 지지직거리는 노이즈가 일어났다. 한은 천천히 패널 앞으로 다가갔다. 그녀의 뇌 옆에 작은 패널엔 노이즈 섞인 문자들이 떠오르고 있었다.
“아..아..지… 하고 싶은 말…. 이 너…. 무. 너무…. 많 많은데…”
이내. 모든 불빛이 사그라들었다. 모든 불이 꺼짐과 동시에, 그녀의 뇌는 마지 바위처럼- 쩍. 하고 갈라졌다. 그렇게 인이 사라졌다.
한은 그 잔해를 끌어안았다.
하지만 남은 것들은 고운 먼지가 되어 흩날릴 뿐이었다.
한은 사라져 가는 먼지들을 그러모으며
천천히 그리고 확실하게 새겼다.
절대로 잊지 못할, 한 사랑을.
영원히 기억될 사랑이 되찾아준 자신의 삶을.
*본 소설은 <망부석 설화>를 모티브로 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