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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퀴어>

‘연결’의 불가능성에 대해.

by 후기록

퀴어


루카 구아다니노 감독의 영화들을 떠올려봐. 콜 미 바이 유어 네임, 아이 엠 러브, 서스페리아 리메이크. 그 어디에도 꺼내놓기 어려운, 그런 누추한 마음들. 나는 그런 마음의 연장선에서 ‘퀴어’란, 그 유약하고 누추한 마음이 어떻게 ‘타인과 연결되고 싶은지’에 대한 긴 여행기라고 생각하게 돼.


‘퀴어’라는 제목을 보고, 나는 감독의 전작 콜 미 바이 유어 네임에서 보여준 소수성애의 풍경을 떠올렸어. 관계의 시작에서 오는 혼란과, 상실의 먹먹한 슬픔. 그리고 그것이 한 사람의 정체성 확립, 혹은 성장으로 이어지는 과정 말이야. 하지만 막상 이 영화를 보고 나면, ‘퀴어’라는 단어에만 국한된 이야기로 보이지는 않아. 오히려 동성애라는 소재는 아주 옅게 깔려 있을 뿐이고, 사실은 <절대> 알 수 없는 타인을 중심으로, 결국 관계란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에 대한 이야기야. 그리고 그걸 알고 있기 때문에 더 알고 싶어함을 갈망하는 이야기이기도 하지.


관계란 뭘까? 나는 가끔 이런 생각을 해.

‘어쩌면 우리는 절대 닿을 수 없는 존재일지도.’라고 말이야.


양자 세계의 이미지에선, 서로 닿고 있는 것이 아니라 닿지 않은 채 진동을 느끼는 존재인 우리들. 그런 생각이 들 때면, 연결이라는 감각은 어쩌면 허상일지도 몰라. 우리는 그저 서로의 마음을 이해할 뿐인걸. 육체적인 부분조차 완전히 공유하기 어려운데, 마음은 얼마나 더 멀리 있겠어. 결국 ‘동일한 감각’을 갖는 일은 불가능에 가까워 보여. 애초에 태어남 자체가 모체와의 단절로 이루어지는 것이라면, 독립적인 존재야말로 인간의 본질인지도 모르지.


리라는 인물은 그런 단절을 극복하려 애쓰는 캐릭터야. 평생을 퀴어로 살아온 늙은 동성애자. 젊었을 때는 꽤 인기 있었겠지만, 이제는 하룻밤 섹스를 나눈 상대에게 돈을 쥐어줘야 하나 고민하는 처지가 되었지. 사랑에 대한 갈증은 점점 커지는데, 누군가와 사랑을 나누는 일은 점점 더 어려워져. 그런 리 앞에, 정말 미스터리 그 자체인 유진이 나타나.


유진은 어느 순간 나타나 리뿐만 아니라 관객의 마음까지도 휘저어 놓는 캐릭터야. (우리가 ‘리의 시선’으로 영화를 보는 것은 후에 다시 이야기할 거야. 이 영화에서 아주 중요한 지점이거든.) 어떤 면에서는 친절하고, 어떤 면에서는 아주 냉정해서 그의 속내를 파악하기 어려운 기분이 들어. 우리가 미스터리를 사랑하는 이유를 생각해 봐. 알 수 없음은 우리를 긴장 속에 빠뜨리고, 상상하게 만들어. 유진의 태도는 그런 점에서 ‘가질 수 없는 욕망’을 들끓게 하지.


리가 “그래도 우리 관계가 의미 있는 거지?”라고 물을 때, 유진은 그렇다고 대답하지만, 정작 그의 이름을 불러주는 일은 극히 드물어. (정확하진 않지만 겨우 두 번 정도였던 것 같아. 콜 미 바이 유어 네임을 떠올려보면, ‘이름이 불린다는 것’의 의미를 다시 생각하게 돼.) 마성의 매력 속에서, 어떤 세상에도 뛰어들 것 같은 호기심 하나로 살아가는 유진은 그렇게 리를 흔들어 놓지. 이 영화의 전체적인 플롯이자 리의 그 ‘타인과 완전히 이해하고자 하는 욕망’은 유진의 태도 때문에 더 커져서, 결국 ‘야헤’라는 식물을 찾아가게 되는 거 아닐까?


‘야헤’를 통해 두 사람은 말 그대로 서로의 심장을 꺼내놓은 채 춤을 추듯, 서로의 몸이 겹쳐지는 경험을 해. 그 장면은 매우 놀라웠어. 처음 언급했던 ‘연결의 불가능성’을 극복하는 듯한, 몸이 겹쳐지고 통과되며 서로를 탐닉하는 그 장면. 나는 그것이 ‘이미 가까이 있으면서도, 더 나아가 한 몸이 되고자 하는 욕망’, 뜨거운 사랑을 하는 자가 느끼는 당연한 감정을 시각화한 장면이라고 느꼈어. 그리고 그 장면은 분명 공포심을 유발하게 찍혔는데, 이는 ‘상대를 완전히 안다는 것’이 얼마나 두려운 일인지도 동시에 드러낸다고 생각해. 그래서 강한 인상을 남겼지.


하지만 이 영화는 결코 유진의 입장에서 서술된 이야기가 아니야. 나는 그 점이 꽤나 거대한 슬픔으로 다가왔어. 이 영화는 철저히 리의 시선에서 진행되고 있고, 결국 그 마법 같은 융합의 과정에서 어쩌면, 정말 어쩌면 유진은 리만큼 리를 원하지 않았을지도 몰라. “더 나아가야 하지 않겠어?”라고 묻는 식물학자의 기대 어린 질문에, 서로를 너무 깊게 알아버린 리와 유진이 같은 결론 ‘여기서 그만두자’에 도달한다는 점에서 말이야. 유진에게 그 경험은 강렬했겠지만, 단순한 호기심으로 겪기엔 너무 거대했는지도 모르지. 야헤에 대한 평가 중 “그건 마약성 약물이 아니라, 자신을 바라보게 되는 거울”이라는 말은 그래서 더 잔인하게 들려. 이 관계가 명확해지는 순간 (그리고 모든 관계가 그렇듯), 둘은 서로의 마음이 다르다는 걸 원치 않아도 깨달아야 했을 테니까.


마지막 장면에서, 노년이 된 리가 유진의 따뜻한 음색으로 불리는 자신의 이름을 듣는 순간, 리에게는 아주 복잡한 감정이 솟았을 거야. 유진의 친절함과 냉정함, 무관심함과 다정함. 그 모든 걸 알아버린 리는 유진을 떠올릴 때 아주 다양한 마음을 품게 되겠지. 꿈속에서 유진에게 총을 쏘는 원망과, 그 시체를 끌어안고 입을 맞추는 죄책감과 사랑. 그 복잡하고 정의하기 어려운 마음의 스펙트럼을 모두 온전히 느끼며, 리는 유진을 회상해. 으레 오래된 인연을 잃어버린 누군가를 그리워하듯. 그렇게 모든 감정이 뒤섞인 하나의 단어, ‘그리움’으로. 마약의 부작용(이자, 리의 외로움이기도 한 고통)에 떨던 그의 다리를 감싸주던 유진의 온기를 말이야.


이 관계 속 감정의 변화들을 생각해 보면, 사실 굉장히 범속한 감정들이야. 그래서 처음 이야기했던 것처럼, 영화의 제목에 노골적으로 드러난 ‘퀴어’라는 요소는 생각보다 옅다고 느꼈어.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이라는 것을 한 사람의 시선으로 아주 지독하게 그려낸 수작이라는 생각이 들어.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나는 여전히 묻게 돼.


관계란 무엇일까?


아쉽게도 (어쩌면 다행히도) 현실엔 심장을 토해내게 하는 야헤 같은 게 존재하지 않아. 우리는 여전히, 상대방과 완전히 섞이고, 자신을 거울삼아 타인을 바라보는 일에 도달하지 못해. 어쩌면 관계란, 그 불가능함에 끊임없이 도전하듯 부딪히며 서로의 피부에 흉터를 남기는 일이 아닐까. 그 흉터들이 곧 증거가 되어, 서로에게 유일한 존재가 되는 일 말이야.


불가능한 걸 알면서도 끊임없이 도전하는 무모함.

그거야말로, 사랑이 아니고선 불가능한 일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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