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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코니의 여자들>

호기로운 첫술.

by 후기록

페미니즘을 조금이나마 편린은 보게 된 건 끽해봤자 10년 남짓일까. 그전에는 나도 꽤 망나니 같은 놈이었지 그렇다고 지금이라고 뭐 얼마나 변했겠냐만.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데 페미니즘 자체는 서프러제트부터(내가 알고 있는 가장 오래된 역사라서…) 지금까지의 시간 동안, 무엇을 바꾸었고, 무엇을 ‘아직도’ 바꿔야 하는지를 떠올려.


발코니의 여자들은 누군가의 시선에선 ‘상당히 도발적’인 문제작이겠다는 생각을 했어. 남편을 엉덩이로 깔아 질식시키곤, 남편이 죽었다는 말에 웃음을 터트리며 잘됐다고 이야기를 나누는 장면은 그 상황관 어울리지 않게 유쾌하고 통쾌한 느낌을 줘. 그리고 그 오프닝 시퀀스로 하여금 이 영화가 어떻게 이 불타는 더운 날씨에 더 이상 참지 못하는 여자들이 남자들로부터 ‘해방’ 할 것인지를 단적으로 보여주지.


여성이란 존재는 뭘까? 이 영화는 그 ‘여성’이란 걸 표현하기 위해 세 명의 여성상을 우리에게 제시해. 외모에 자신이 없어 자기 행동을 ‘자기 검열’하는 니콜. 자신의 몸에 대해 자유롭게 드러낼 뿐이지만 ‘헤픈 여자’로 취급되는 루비. 그리고 결혼한 ‘아내’의 역할을 못 한다고 비난받는 엘리즈. 이렇게 다양한 억압받는 여성상을 주인공으로 내세워서 이 여자들이 어떤 대상들을 이겨내는가? 가 이 영화의 전체적인 플롯이라고 볼 수 있겠네.


여성이란 뭘까? 나는 이 질문을 떠올리면서도 묘한 기분이 들어. ‘~~ 란 뭘까?’란 질문 자체가 그 대상의 ‘특별함’을 찾아내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거든. 과연 여성이란 것이 그런 특별함을 가지고 있다고 할 만큼 ‘신비감’을 가지고 있는 존재일까? 이 질문에 대한 답으로 이 영화는 정면으로 그 얇디얇은 신비의 장막을 찢어버리고 벗어나.


그 여성의 미스터리에 대한 해방의 단적인 증명으로 이 영화가 여성의 몸을 표현하는 방식은 좀 많이 ‘달라. ‘아주 더럽고 아주 날것의 표현. 예쁘려고 노력하지 않고 남성에게나 판단될 섹스어필의 뉘앙스를 배제한 채로 우리에게 제시돼. 그 수많은 가슴과 엉덩이, 심지어 음부까지도 노출이 됨에도 이 영화에서 섹슈얼한 지점은 기존의 미디어가 그려낸 여성의 몸에 대한 ‘아름다움’과는 거리가 많이 멀어.


나는 이 부분에서 이 여성의 몸, 아주 조금 가려져야 더 긴장감을 만들어 내는 섹스어필을 의도적으로 배제하고 있다고 느꼈어. 내 가슴은 그런 시선이 필요 없다. 그런 것 없이도 내 몸은 아름답다. 당신들의 시선으로 평가될 껀덕지 따윈 없다.라고 일갈하듯, 그런 시선들에 대한 해방을 말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더라고.


몸에 대한 해방이 이 영화에서 아주 큰 틀을 차지하고 있음에도, 정신적인 부분에서의 해방 역시 놓치지 않고 챙겨가는 느낌이었어. 단적으로 이 세 여자는 각자 참’ 계몽적‘인 대사들을 하나씩 가지고 있지. 니콜은 ’ 여성의 신비함‘은 여성에게 짐이었다는 것을, 루비는 여성의 섹스에 대해서, 엘리즈는 결혼이라는 관계의 기괴함을 아주 직설적으로(너무 직설적이라 이야기에 튀어 보이기까지 할 정도로) 직접적인 대사를 꺼내곤 각자의 성장을 이뤄내지. 다만 이 부분은 몸의 해방이 연출적인 측면에서 잘 이뤄진 것에 비해선 조금 거칠다고 느꼈어. 그 뜬금없는 부분이 더 ‘블랙코미디‘같아서 좋았지만.


결국 나는 이쯤에서 질문을 바꿔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을 해 ‘여성이란 무엇인가?’라는 여성을 인간에서 배제한 질문이 아니라, ‘무엇이 여성들을 미치게 만드는가?’라는 질문으로. 이 신비할 것 없는 여성들을 구분 짓고, 대상화하는 원인에 대해서 말이야. 이 영화의 배경이’46도‘의 불타는 기온의 마르세유인 지점이 바로 여기에 있어. 이 가만히 있어도 버틸 수가 없는 불타는 세계를 만들어낸 원인은 이 미치기 일보 직전의 여자들을 복수가 아닌 ‘자기 방어’를 할 수밖에 없게 만들어. 사냥이 아니더라도 독을 뿜어내는 살무사가 가만히 있다고 건들면, 물리게 되는 것처럼 말이야. 목숨이 아깝지 않다면 그냥 계속 똑같이 하면 돼. 그러다가 죽으면, 작중의 유령들처럼 ‘죽어도 모른 채’ 남겨지게 될 테니까.


누군가의 시선에선 ‘도발적인’ 작품일 거라고 했지만, 안타깝게도 이 이야기들이 새롭게 느껴지진 않아. 그런 점에선 <서브스턴스>가 생각나기도 하고 말이지. 그리고 그 새롭게 느껴지지 않는 이야기가 아직도, 누군가에겐 ‘도발적인’으로 평가될 거라는 생각을 하면 나는 사실 조금 기운이 빠지기도 해. ‘아직도? 대체 얼마나 더 알려줘야 해? ‘싶은 생각이 든다고 할까. 그런 지점에서 생각해 보면 참 친절한 영화야. 남자들을 그렇게 죽여대면서도 남자들이 스스로 반성하게 만들려고 아주 지난한 노력을 하고 있거든 이 영화는.


하지만 그럼에도 이 영화를 보면서 웃지 못할 남자들이 있겠지. 특히 요즘엔 더욱이나 그런 사람들이 더 많을 것 같아. 하지만 세상의 지식은, 흐름은 분명 거대한 줄기가 있고 그 줄기는 변해가고 있다고 느껴. 세상은 너무도 거대한 줄기라서 비단 바다처럼 보일지라도, 수많은 억압받는 존재들의 부딪힘이 강벽을 휘게 만들고 있다고. 이 영화도 그 밀어냄의 한 줌의 힘을 조금이나마 더하는 영화라고 난 생각해.


하지만 딱 그 정도.


너무 좋다고 말하기엔 절대 그럴 수 없네.

이 영화는 아주 ‘계몽’적인 지점이 분명히 있지만, 그게 ‘영화’로서 완성도가 있냐면, 나는 글쎄… 그렇게 잘 다듬어진 이야기라는 생각은 들지 않아. 아쉬운 점을 나 역시 노골적으로 이야기하자면. ‘하고 싶은 말이 많아서, 일단 다 집어넣어봤어.’ 하는 태도로 느껴졌다고 할까. 그런데 그 이야기가 조금 ‘낡았다.’라는 느낌까지 들어버린다면? 이 영화가 주려는 메시지의 좋음과는 별개로 참 아쉬운 지점이 되는 듯해.


뭐 첫술에 어떻게 배부르겠냐만.


이 영화에서 너무 큰 만족을 하지 못했더라도, 이 영화 특유의 유머러스함은 유니크하고, 난 이런 답답한 현실을 비튼 블랙코미디는 언제나 환영이야. 다음 작품이 기대되는 첫술 정도로 마무리할까 해. 괜찮은 영화였어. 하지만, 이 영화를 정말 봐야 하는 사람들은, 절대 안 보겠지? 그 사람들에게 ‘독을 뿜는 살무사의 자기 방어’를 조심하라는 말을 남기면서.


오브아르! 노에미 멜랑!




이하 스포일러 구간 및 추신들.




1. 성 판매 사업을 ‘기쁨’으로 한다는 루비가 ‘뱀 분장’을 했을 땐 방송의 시청자가 0명인 점은 참 선연한 메타포야. 남자들 앞에서 사정의 모습을 보일 정도로 이 일을 즐기던 루비가, 남자를 물어 죽일 정도의 힘이 있는 루비 자신의 진짜 정체성을 드러냈을 땐 정작 아무도 섹스의 대상으로 판단하지 않는다는 점 말이지.


2. 엘리즈의 폴과의 섹스 이후의 모습은 ‘강간 피해자’를 연상케 해. 동의 없는 섹스의 폭력성을 있는 그대로 표현한다는 점에서 루비의 ‘허락 맡고 들어와’라는 대사와 연결돼. 그리고 이 ‘강간’이라는 경험을 한 루비와 엘리즈는 까짓 ‘남성’ 따위 없어도 차가운 ‘흙’과 ‘나무’로 만들어진 의자만으로도 오르가슴에 도달한다는 점에서 이 영화의 자세를 확인할 수 있어.


3. 니콜에게 유령들이 보이고, 또 대화의 주체가 되는 이유는 니콜만이 아직 이 남성들에게 기대하는 바가 남아있어서가 아닐까 싶어. 결국 이 남자들은 정말 믿을 수 없이 멍청해서 정말 말 그대로 ‘죽어도 깨닫지 못하는 것’이 있어서 그걸 아주 ‘친절하고’,‘다정하게‘ 알려줘야만 하거든. 그 역할을 위해 존재한다고 할까. 친구에게도 또 자신을 분노하게 함에도 참 다정한 여자네. 이 영화의 어쩌면 마지막 동정일지도 모르겠다. 그게 필요한지는 의문이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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