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의 풍경. 그리고 그 소리들.
청설
제목 때문에 겨울 영화인가 싶었지만, 사실은 영화 내용과 연결된 ‘이야기를 듣다’라는 의미임을 먼저 밝혀두고자 해.
요즘 영화계는 참 뭐라 말하기 어려운 지점이 있어. 예를 들자면, 몇백억짜리 블록버스터도, 몇만 달러짜리 저예산 영화도, 지구를 위태롭게 만드는 거대한 서사도, 아주 사소한 연애도…그 모든 주제로 각각의 영화들이 만들어지지만, 같은 멀티플렉스라면 ‘같은 가격’의 한 표로 겪을 수 있다는 점 말이야. 비싸진 영화표 값에 ‘이왕이면 다홍치마’라는 말처럼, 이 시류에 의해 한 장르가 사장되어 가고 있지. 바로 로맨스야.
<청설>은 그런 로맨스의 멸종 과정 속에서도 미약하게나마 그 명맥을 잇고 있는 영화야. 물론 오리지널 각본은 아니고 원작이 있는 이야기이긴 하지만, 오히려 그 소재는 과거보다 지금 이 시대에 더 의미가 있다고 느꼈어.
청각장애인, 혹은 농인의 삶을 다루고 있다는 점이 이 영화의 가장 큰 특징이야. 기본적으로 로맨스를 중심에 둔 이야기이기에 너무 현실적인 장면들을 모두 담긴 어렵겠지만, 차별과 어려움—특히 생존의 어려움에 대한 지점은 제법 명확하게 드러나. 특히 작중 가을이의 화재 사고 장면은 너무 괴롭지. 우리의 시스템이 얼마나 ‘장애 아이덴티티’를 가진 사람들을 배제하고 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주니까. 어쩌면 우리는 아직 한참 더 나아가야 할지도 몰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로맨스를 그려내는 장면들은 너무도 풋풋하고 아름다워서 미소를 짓지 않을 수 없어. 주인공 용준과 여름의 관계는 우리가 이미 익히 알고 있는, 흐뭇한 미소가 지어지는 그런 관계야. 어색하게 번호를 교환하고, 동생의 배려로 단둘이 밤길을 좀 더 걷기도 하고, 용준이 고백을 앞두고 긴장한 눈빛으로 ‘너를 처음 봤을 때부터…’라고 손짓하는 장면에선, 여름이가 장애 정체성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 사랑을 하는 데 있어 전혀 다르지 않다는 걸 느끼게 돼. 맞아, 그저 20대들의 아주 풋풋한 연애야. 단지 말이 아니라 수어로, 그래서 더 진솔한 눈빛과 표정, 그리고 그것을 읽기 위해 반드시 마주쳐야만 하는 둘 사이의 교감이 있을 뿐.
이런 지점들을 떠올리며 나는 이 영화를 ‘참 예쁜 영화’라고 느꼈어. 물론 배우들의 외모도 한몫했지만, 여름날의 무드를 정말 잘 담아냈다고 생각해. 그리고 그 무드를 형성하는 데 있어 가장 중요한 역할이, 아이러니하게도 ‘소리’라는 점이 참 놀라웠어.
영화 속 주요 인물들의 대화는 대부분 수어로 진행되기에, 이 영화에서 의도적으로 배제된 음성언어의 자리를 채우는 건 바로 배경음이야. 매미 소리, 선풍기 소리, 물소리, 사락거리는 나뭇잎이 스치는 소리들. 무언가가 사라졌을 때 더 많은 것을 느낄 수 있다는 점에서, 작중 표현된 ‘농인은 듣지 못하는 사람이 아닌, 더 잘 보는 사람’이라는 의미를 느슨하게나마 비유하고 있다고 느꼈어. 어쩌면 우리는 너무 하나에만 집중해서, 주변의 모든 걸 잃고 있는 건지도 모르지. 건청인의 입장에선, 농인을 발견하기조차 어려운 것처럼.
이하 스포일러 구간(진짜 개큰 스포일러 진짜진짜)
이 영화에는 반전이 있어. 사실 작중 여름은 ‘코다(Children of Deaf Adults)’였다는 점이 작중의 최후에 들어 드러나지.아니, 거기서 더 나아가 여름의 입장은 가족 중 유일한 건청인이라는 ‘오코다(Only Hearing Child of Deaf Adults)’였던 거지.
이 반전이 드러남으로써, 영화가 포용하는 울타리는 단순히 ‘농인’에서 ‘코다’까지 넓어지게 되고, 그 삶을 조명하는 방향으로 하이라이트가 이동하게 돼.
“나는 내 세상이 모두 다 똑같은 줄 알았어.”
이 말과 함께 상상되는 그녀의 삶은, 장애 가족들을 돌보는 일을 자신의 삶의 우선순위로 두었던 여름의 삶이, 오히려 장애 당사자들보다 더 건조하고 매말라 있었음을 보여줘.
어쩌면 자기소개를 하기보다 ‘우리 부모님은 농인입니다’라는 말을 먼저 해야 했던 삶.
나는 감히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짐을 지고 살아왔을 그녀의 삶이 떠올랐어.
이 이야기의 가장 중요한 변화는, 여름이 가족을 ‘동정’의 시선에서 해방되는 순간이야. 여름이 가족을 사랑하는 만큼, 가족들도 여름을 사랑하기에 그녀의 도움을 거부함으로써 표현되는 역방향의 사랑. 그 사랑을 느낀 여름의 눈물이, 그녀의 매마른 삶을 조금이나마 적셔주고, 그렇게 영화는 여름의 삶이 조금, 하지만 확실하게 변할 것임을 보여줘. 꽤 영리한 반전이었어.
나도 요즘 수어를 공부하고 있어서 더욱 관심 있게 본 영화야.어떤 대화들은 자막이 없어도 읽히는 걸 보면서, 헛되이 공부하진 않았구나 싶었지.
대한민국의 농인은 약 35만 명 정도, 수어 통역사는 약 2000명 정도라고 해. 단순 계산이지만, 통역사 한 명이 대략 200명을 커버해야 한다는 점에서, 이 나라가 ‘장애’와 더 나아가 ‘사회적 복지’를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지를 떠올리게 돼.
그럼에도 장애를 다룬 방식이 다소 가볍게 느껴질 수도 있지만, 난 이 영화가 참 좋아. 다른 장르에서, 더 정밀하고 비판적으로 장애나 차별을 다루는 작품들은 많을 테니까. 이 영화는 그저 농인의 일상을 (비록 너무 희망적으로 보일지라도) 그려낸다는 점에서, 그리고 그것을 ‘예쁘게’ 표현했다는 점에서 좋았어. 이런 웃음과 감동이 있는 작품에게, 나는 너무 엄격해지고 싶지 않더라고. 작중 용준의 아빠가 했던 말이 떠올라.
“못 들어? 그게 뭐? 좋은 사람이면 되는 거 아냐?”
그런 무던함을 우리도 좀 더 자연스럽게 가질 수 있게 되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이 여름이 너무 덥고, 마음이 조금 매말라 있다면 이 영화를 추천해. 아주 예쁘고, 청량하고, 따뜻하고, 감동이 있는 그저 평범한 우리네 삶을 그리는 영화니까.
그러다 수어에 관심이 생긴다면,
언젠가 우리도 수어로 이야기를 나눌 수 있기를.
그때를 기대하며, 나도 열심히 배워놓을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