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두가 괴물인 세상에선, 아름다운 것이 괴물인 것이지.
1.낭/야만의 시대.
우스갯소리로 하는 말. ‘낭만의 시대’ 글자 하나 바꿔서는 또 ‘야만의 시대’라고도 불렀던 때가 있었다. 자본주의의 향을 기막히게 맡은 사람은 말 그대로 돈에 휩쓸려 정신을 못 차리고, 그 파도를 가지지 못한 나머지는 말려 죽는 시대. 누구는 호황을 떠올리고, 누구는 절망을 기억하는 것은 둘 다 틀린 말이 아니다. 빛이 너무 밝으면 그림자도 그만큼 짙어지는 법이니까.
영희의 세계를 떠올린다. 40년이 지나도 다른 모든 요소보다 ‘못생겼다.’라는 말로 기억되는 그녀의 삶. 모두가 보고 알고 있으면서도 ‘옳지 않게’ 유지하려는 것들에 ‘이러면 안 되는 거잖아요’라고 말을 꺼내는 그 ‘미친 여자’를 떠올린다. 그녀가 사회에 적응하기 위해 고개를 숙였을 때는 과연 어땠는가. 부조리에 감화되어 살아갈 때 그녀는 분변마저 제대로 처리할 권리조차 없었다. 사회에 폭력의 피해자가 폭력의 증거로 남는 ‘똥걸레’라는 별명으로 기억된다. 시대정신은 그것을 차 한 잔과 함께 떠올리는 아름다운 추억, 그 속에 묻은 티끌처럼 취급한다.
그러니 영희는 가만히 있을 수 없는 것이다. 모든 폭력이 정상인 세계. 돈으로 사람을 무시하고, 마음에 안 들면 죽이고, 권력으로 누군가를 성폭행하면서도 피해자에게 손가락질하는 게 정상인 세상에서 영희는 미쳐 있는 여자다. 그게 그녀의 세계다.
그로부터 40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여성의 삶은 변함없이 고되다. 현재에 들어서도 뭐 크게 다를 바 없는 현실을 떠올린다. 여전히 데이트 중에 누군가는 죽는다. 여전히 혼자 살고 있다는 게 드러나면 그것만으로도 위험에 내던져진다. 사회 진출의 장은 넓어졌지만서도, 여전히 여성들의 목소리는 타자화된다. 안전에 대한 외침은 그녀들을 ‘미치고 괴상한 괴물’로 처리해 버린다. 이런 세상에 매번 제정신을 차려야 하는 것은 여성이다.
권력에 의해, 현실에 의해, 사회에 의해. 소위 부조리 혹 필요악에 휘둘리는 와중에 인간의 삶을 유지하기 위해, 진정으로 ‘제정신’을 가져야 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현상의 피해자들이 정신줄을 붙들고 살아야 한다.
2.카메라와 눈의 상관관계
사진기를 떠올리면, 꽤 무서운 생각을 가끔 한다. 현실을 기록하는 측면에서는 어쩌면 가장 사실적인 방법이면서도, 한편으론 대상을 네모난 프레임 안에 배치하고, 구성하고, 더 나아가선 셔터를 누르는 순간까지 그 모든 결정이 사진사의 손에 의해 결정된다는 점에서 가장 형식적이고 ‘착취’적인 장르가 아닐까 한다.
그런 형식성을 등에 업은 대부분의 카메라들이 담는 것은 바로 ‘얼굴’일 것이다. 언제나 사람이 사람을 찍는다. 과연 이 상황이 ‘언제나’ 평등하다고 할 수 있을까. 누군가는 반드시 누군가를 ‘쏴야(shooting)’ 하는데도 말이다. 그런 지점에서 이 영화의 제목은 꽤 흥미롭다. ‘얼굴’, 한편으론 ‘얼이 나오는 굴’이라서 얼굴이라고 하던가, 영혼의 모양이 드러나는 창문의 역할을 한다고 하던가. 각자의 얼굴의 의미들을 떠올리면서 영화를 보면 꽤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그 카메라를 가지고 있는 인물들은 강력한 힘이 있다는 점을 영화 내에서 발견할 수 있다. PD인 ‘김수진’도 피복공장 사장인 ‘주상’도 착취가 아니고서는 가치를 만들어 낼 수 없는 사람이라는 점이 눈에 밟힌다. 이 영화에서 ‘촬영’이란 것은 착취이며 권력이다. 그 권력으로 기록되는 얼굴들을 떠올린다.
그 착취의 카메라가 영화의 플롯상 가장 먼저 비추는 대상이 ‘임영규’라는 점이 섬뜩한 기분을 들게 한다. 그는 선천적인 시각장애인이다. 이 영화의 메타포를 따르자면 그는 절대 ‘카메라’를 가질 수 없는 인물이다. 권력의 밑바닥에서 밟혀 있는 채 살아가야 하는 인물. 그 ‘최약자’의 자리를 극복한 듯 보이는 그의 이면엔 사실 같은 약자인 ‘영희’를 잡아먹은 진실이 존재하는 것은 참 분노케 하는 이야기다.
그런 영규의 이야기는 참 ‘지루하다.’ 힘든 선을 선택하지 못하고 ‘쉬운 악’을 고르는 이야기는 얼마나 평범한가. 아름다운 도장을 파내는 본인의 손이 아닌, 가질 수도 없는 ‘정상 세계’의 눈을 갈망하고 그것을 따라서 영희를 죽이게 되는 것은 너무도 한심한 나태한 악의 모습이다.
우리는 이 지점에서 질문을 떠올린다.
‘무엇이 추하고 무엇이 아름다운가?’라는 질문을 말이다.
3.영희의 얼굴
영화는 최후에 들어 영화 전체에 숨겨 왔던 영희의 얼굴을 ‘공개’하는 선택을 한다. 놀랍게도 작중 인물들이 궁금해한 것이 무색할 만큼 너무나도 ‘평범’한 얼굴이다. 장애가 있었나? 아니면 괴질이 있었나? 의심하던 모든 관객에게 드러나는 이 평범한 ‘여성’의 얼굴은 오히려 드러남으로써 하나의 플롯 트위스트가 된다는 점은 꽤 흥미롭다.
이 평범한 얼굴을 가진 영희를 ‘추하다.’라고 평가한 인물들을 떠올린다. 모두가 추함을 아름답다라고 말할 때, 정확히 추하다라고 바라보는 사람은 얼마나 미친 사람처럼 보일까. 미친 사람에게 당신의 광증은 사실 정상이라고 같이 미쳐 줄 사람은 과연 그 세상에 존재할까.
아마 그 인물들은 영희의 외모만을 그렇게 느낀 게 아닐 것이다. 유난히 단단하고, 유난히 강직하고, 유난히 곧은 그 여자를 꺾으려고 하는 방법이 고작 ‘못생겼다’라는 나약하고 치졸한 비아냥이라는 점을 떠올린다.
4.그럼에도 불구하고
연상호 감독의 <얼굴>은 분명 시의성이 있어 보인다. 그의 감각은 <돼지의 왕>, <부산행>, <염력>, <지옥> 등을 통해 많은 질문들을 특유의 염세적 시선을 통해 던진다.
그럼에도 한편으론 그가 만들어 내는 ‘불편함’에는 크게 동의하지 못한다.
결국 그 역시 ‘카메라’를 든 남자라는 점에서 이 이야기는 너무 ‘투박’한 이야기다. 약자가 약자를 죽이고 집어삼키는 이야기를 써내는 것은 이 역시 너무 ‘쉬운, 지루한’ 일이 아닌가.
그리고 그의 염세적 시선에는 쉬이 동의하지 못하는 것은 나 뿐만이 아닌 듯 하다. 작중의 배우들의 연기는 묘하게 과장 되어 있다는 점에서, 이 ‘기능적인’연기들에 나는 묘한 불편함을 느꼈다. 훌륭한 배우들이 산재한 이 영화에서, 마치 단순히 이야기 전달만을 위해 존재하는 연기는 인형극을 연상캐한다. 정말 여러 요소가 말 그대로 ‘투박’하다. 특히 절정에 든 권해효 배우의 15분 남짓의 독백은 그의 훌륭한 연기를 차치하더라도 지루한 ‘변명’이다. 이런 것들이 눈에 밟힐때마다 나는 연출의 아쉬움을 토로할 수 밖에 없다.
그럼에도 이 ‘평이한’ 영화를 보면서 그의 재능과 능력에 대해서 의심하는 것이 아니다. 한편으로는 그의 영화를 여전히 기다리고 기대할 수 있는 징검다리가 될 것 같은 영화라고 느꼈다.
그러니 그는 계속 본인의 감각을 갈고닦기를 기원한다. 언젠가, 그가 생각하는 ‘인간성’의 답을 찾는 순간에 완성될 영화를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