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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러 넘버 3>

‘계기’가 불어오는 곳.

by 후기록

미러 넘버 3


‘라우라’. 그녀 스스로 말한 대사처럼 (“그리 떳떳한 관계는 아니었어요.”) 그녀는 어울리지 못하는 자리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장면으로 영화는 시작한다. 이후 차 사고를 통해, 그녀에게 어울리지 않는 자리였던 남자친구의 조수석에서 말 그대로 죽었다가, 슬픔에 잠긴 여성 ‘베티’에 의해 다시 살아나게 되면서 이야기는 본격적으로 시작한다.


상실은 정말 고통스럽다. ‘나’라는 존재를 조금이나마 공유한 존재를 잃는다는 것은 그만큼 나를 찢어내는 듯한 고통이 동반된다는 점에서, 우리는 누군가를 만나 ‘살아가고’ 또 이별하면서 ‘죽어가는’ 일을 반복하는 것이 인생일지도 모른다.


그런 지점에서 <미러 넘버 3>가 이야기하고자 하는 바는 이전 ‘크리스티안 펫촐드’의 영화의 궤와 계속 연결된다. 프랑스 감독 장 르누아르의 “감독은 평생 단 한 편의 영화만 만든다.”라는 말처럼, 이번 <미러 넘버 3>의 키워드는 이전의 영화 <피닉스>, <운디네> 등에서 다룬 정체성과 상실에 대한 연장선에 있다.

다만 이 이야기의 끝은 이전의 영화들과는 조금 다르다는 점에서, 그의 필모그래피의 거대한 서사 속 한 단계 더 나아갔다고 볼 수 있을 듯하다.


<미러 넘버 3>를 통해 조금 더 진행된 지점은 바로 ‘회복’의 지점이다. 이 영화에서 베티와 라우라는 기묘한 관계를 형성한다. 라우라는 베티를 통해 구조되고, 베티는 라우라를 통해 구원된다는 점에서, 이 두 사람이 그려내는 모습은 짐짓 꽤 아름다워 보인다.


아름다운 전원의 풍경을 더해, 이 두 ‘유사 모녀’의 관계는 자못 완벽하게 보인다. 이 점은 조금은 마음을 따뜻하게 한다. 다만 이 따뜻함은 영화가 대부분의 장면에서 그려내는 빛의 명암처럼, 그림자가 있다는 것을 관객은 쉽게 알 수 있다. 스쳐가듯 하지만 명확하게 제시되는 ‘옐레나’라는 이름은 이 행복해 보이는 관계에 그림자로 존재해 불안감을 계속 유지시킨다. 그리고 이는 베티의 가족이 등장하면서, 주변인들의 시선 속에서 지속적으로 존재하며 점점 더 커진다.


이 불안감을 안고 진행되는 영화의 모습에서도, 그럼에도 이 ‘아직은 알 수 없는’ 상처를 가진 가족이 회복되는 과정을 바라보는 일은 꽤 기쁨을 동반한다. 아주 오랜 시간 같이 식사를 하지 않았다고 고백하는 남편과, 초반부에 베티를 더 이상 참지 못하는 아들의 태도는, 라우라의 존재를 인정하고 그녀가 베티에게 큰 도움이 된다는 것을 받아들임으로써 가족의 형태를 완성해 간다.


베티 혼자서는 겨우 담장을 새로 칠하는 일이었지만, 그 두 사람의 손에 의해 수도꼭지가 수리되고 식기세척기가 작동한다. 라우라 이전에는 많은 것들이 ‘고장 난’ 이 집은 말 그대로 ‘가족’ 그 자체를 은유하고 있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을 듯하다.


하지만 빛이 점점 밝아지게 되면, 그림자는 곧 무엇을 숨기고 있는지 드러낼 수밖에 없다. ‘옐레나’가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는 것, 그것이 원인이 되어 해체된 가족이 되었다는 것, 그리고 베티가 사실은 라우라를 죽은 딸에 이입해 대체재로 대했다는 것을 말이다.


물론 이에 대해선 반론의 여지가 없다.

마술이 매력적인 이유는 그 ‘원리와 비밀’을 모르기 때문이니까. 사람들은 마술의 트릭이 드러나는 순간 다양한 반응을 보인다. 실망하기도 하고, 분노하기도 하고.


라우라와 베티의 관계가 그토록 마법같이 끌렸기에, 그 ‘트릭’이 드러나는 순간 라우라는 분노하기를 선택한다. 이 가족을 통해 느낀 기쁨이 본인 스스로의 정체성으로 인한 것이 아니었다는 걸 알게 됐을 때, 이 ‘가족’은 첫 시퀀스에서 그녀가 느꼈던 ‘내가 있을 자리가 아님’을 다시 느꼈을 테니까.


그리고 이 ‘맞지 않음’을 느낀 것은 비단 라우라뿐만이 아니다.

베티와 그의 가족 역시, 베티가 떠나는 순간 그녀의 아버지가 건네는 돈을 통해 깨닫게 됐을 것이다. 그녀가 이 시골에 어울리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결국 마법은 풀려난다. 심지어 상호적으로. 안타깝게도.


하지만 단지 이것이 이 이야기의 전부일까?

대체재로 사용하고, 이용하고, 죽음을 부정하고, 서로에게 분노하는 것이 이 이야기의 끝일까?


이 슬픔의 무덤 앞에서 우리는 그저 무력하게 ‘상실’을 안고 무너져야 할 테지만, 영화는 그렇지 않다. 사람의 감정에는 가속도가 있다. 마치 중력처럼. 그렇기에 그 방향을 바꾸기 위해선 ‘계기’라는 것이 필요하다.


베티는 고백한다.

“너를 단순히 대체재로만 여기지 않았어.”

그리고 그를 증명하듯, 옐레나의 흔적을 정리하기로 결심한다.


시간이 지나, 라우라의 졸업 공연을 몰래 보러 가는 베티의 가족들. 라우라는 그것을 알아채고서도 연주를 끝마친다. 이내 각자의 세계로 돌아와 식사를 나누는 베티의 가족과, 푸른 녹빛이 가득한 창밖을 보며 가볍게 미소 짓는 라우라를 보여준다. 마치 오해가 드디어 풀린 것처럼. 사랑이라는 진심이 서로에게 가닿은 것처럼.


‘대체’한다는 것이 옳지 못한 방법인 건 굳이 이야기할 필요도 없을 만큼 모든 사람들이 알 터. 하지만 결국 방향을 바꾸는 것은 하나의 ‘계기’다.


라우라는 망망대해에 떠도는 베티 가족에 가 닿은 순풍으로서, 마지막에 그녀의 웃음은 어쩌면 ‘회복된 가족’을 바라보는 따뜻한 웃음일지도 모르겠구나 싶은 생각도 든다. 그녀가 영화 초반 ‘어울리지 않는 자리’에서 시작해, ‘배신당했다고 믿었던’ 것을 지나, 마지막에 닿아 ‘결국 옳은 자리였음’을 깨닫는 순간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영화를 보는 내내 <피닉스>를 계속 생각했다. 꽤나 닮은 이 영화들 사이에서 주인공인 두 여성들이 가지는 정체성은 무엇일까. 두 작품 모두 용서라는 것을 선택할 수 있는 존재라는 점에서 신과 인간 어디 중간에 지점의 존재들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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