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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의 주인>

결국 주인은, 슬픔이 될 수 없기에

by 후기록

세계의 주인.


어떤 영화는 이렇게 말을 건네듯이 써야만 할 것 같은 기분이 들어. 조금이나마 응원하는 마음을 담고 싶은 걸지도, 조금이나마 상냥함을 세상에 전달하고 싶은 마음인 걸지도.


<세계의 주인>은 윤가은 감독의 6년 만의 복귀작이야. 우스운 말이지만 <우리들>에서 <우리집>, 그리고 지금의 <세계의 주인>까지 — 점점 확장되어 가는 제목의 크기에서 조금 유머러스함을 발견할 수도 있을 거야.


영화의 전개 방식에 따라 이 영화를 감상할 때 주의할 점은, 어떤 정보를 가지고 있느냐 없느냐의 차이에 따라 다를 것 같아. 그래서 1회 차 감상과 2회 차 감상의 느낌도 많이 다르지 않을까 싶기도 하고. 그렇기에, 너무 늦게 말한 것 같지만 결국 이 리뷰는 영화를 본 사람들에게 적용될 이야기니 만약 아직 감상 전이라면 영화를 꼭 봤으면 좋겠어. 진심을 다해서.


(이하 스포일러 구간)




1. 위로하는 마음, 기도하는 마음


영화의 작법 자체에 대해 이야기해 볼까. 평범한 일상이 비일상의 형태로 바뀌는 순간에 대해서 말이야. 이 영화의 분위기가 반전되는 지점은 주인이의 고백에서 비롯되는데 (얼추 절반쯤 되는 시점인 것 같아.) 이 변화는 놀라울 만큼 영리하다고 할 수 있어. 영화에서 분명히 ‘정의’되지 않은 불안감을 계속 끌어오면서, 그 ‘변화’의 순간에 우리 또한 작중 인물들과 같은 태도를 가지게 된다는 점에서 말이야.


위로의 지점은 참 애석하게도 타인으로부터 비롯된다는 점에서 ‘타인이 사건을 알게 되었을 때’라는 것을 떠올리게 해. 누군가의 상실을 알게 됐을 때 우리는 “미안하다”고 하고, 누군가의 트라우마를 알게 됐을 때 “힘내라”고 말하곤 하지. 하지만 이 방법이, 이 태도가 정말 맞을까? 오래 알고 지낸 친구의 오래된 상처를 지금 들었다고, 지금과 연결해서 위로를 건네는 것이 과연 옳은 일일까 생각해 봐. 이미 너무나 열심히 살아가고 있는 사람에게 ‘힘내’라고 말하는 것이 얼마나 무용한 일인지도 말이야.


주인이는 평범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참 바쁜 아이야. 몸을 쓰는 일에 대해서라면 더욱 그렇지. 몸의 대화인 키스도, 대련의 방식인 태권도도, 세상과의 만남인 자원봉사도, 환경과의 상호작용인 우정의 교류도 모두 그래. 이 넘치는 에너지는 단지 쾌활한 아이로 보이게 하지만 (실제로도 그렇고), 우리는 새로운 정보를 통해 이 아이의 세계를 다시 필터링하게 돼. 주인이의 육체를 쓰는 방식은 마치 폭포수를 맞는 수련의 형태 같기도 하다는 점을 말이야.


이 영화는 그런 점에서 어쩌면 참선과 제계의 형태를 띠고 있는지도 몰라. 마치 기도하는 마음처럼. 그리고 그 기도하는 마음은 단지 ‘주인’만의 것이 아니라는 점이, 이 영화가 가진 울림의 지점이기도 해. 태선도, 해인도, 유라도, 자조모임도, 하물며 (내용은 잘못된 말이라 할지라도) 할머니까지도. 이 영화의 영제가 <월드 오브 러브>라는 걸 생각해 보면, 나는 주인이의 세계가 사랑으로 둘러싸여 있어서 참 다행이라는 생각을 해. 주인이의 행복을 위해 기도하는 사람들이 이렇게 있다는 것, 그것만으로도 말이야.




2. 아프다는 것을 말하는 법


이 이야기의 서브플롯으로는 누리의 이야기가 존재해. 이 이야기가 불안감을 키워가는 방식 또한 꽤 영리하지. 어디선가 계속 상처를 얻어 오는 아이, 어쩌면 폭력의 증거로 보이는 그 멍자국을 바라보는 보호자 수호의 이야기. 누리는 ‘아프지 않아’라고 말하는 것이 강하다고 생각하는 듯해.


이 영화에서 ‘아프다’라고 말하는 일은 한편으로 자신의 상처를 인정하는 일과 같아. 아무런 이야기가 드러나지 않았을 때는 스산한 불안감만이 존재하지만, 주인 이를 비롯한 인물들이 자신의 아픔을 드러내면 반드시 무너지는 장면이 이어져. 정신적으로든 신체적으로든. 주인이가 세차장의 물살 속에서 감정을 쏟아내는 모습, 미도가 법정에서 터뜨리는 눈물, 약으로 버텨 왔던 통증에 결국 쓰러지는 태선의 모습도 그렇지.


비슷한 고통, 혹은 같은 사건에서 퍼져 나온 폐허의 조각들 속에서 고통을 이야기하는 일은 쉽지 않아. 사건 이후에도 삶은 계속되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것을 ‘잊은 것처럼’, 혹은 ‘없는 것처럼’ 살고 싶어 하니까. 주인이의 아버지처럼 어디론가 도망가 버리거나, 미도를 신문하는 변호사처럼 그것은 아픔이 아니라고 하거나. ‘피해자다움’을 강요하는 일은 너무 쉽고, 개인을 ‘피해자’로 분류해 일괄적으로 처리하는 방법은 경제적이며 효율적이기까지 하니까. 결국 ‘아프다는 것을 말하는 것’을 불편하게 느끼는 세상이라는 사실이, 나는 너무 슬퍼.


그렇다고 그런 세상이라서 우리가 그런 말을 하지 말아야 할까?

당연히 그럴 수 없어. 그러고 싶어도 그럴 수 없는 일이야. 사건 뒤에도 사람은 살아가니까. 누군가는 ‘완전히 망가진 인생’이라는 진부한 말로 덮어버릴지라도, 인생은 일방통행이라 덮어쓰는 일은 불가능하지. 그 ‘피해자’라는 정체성이 한 사람의 인생을 모조리 덮어버리는 것을, 이 영화는 긍정하지 않아. 모두들 애써 살아가. 가끔은 참을 수 없는 고통이 밀려와도, 마음과 영혼이 다시 그때로 되돌아가더라도, 서로의 손을 잡아끌어 현실로 돌아오지. 그렇게 애쓰며 살아가는 사람들. 아픔을 아프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서로를 보듬는 이 영화의 태도는 그래서 참 아프면서도, 곤란하면서도, 고마워. 아직 주인이처럼 세상에 부딪힐 준비가 되지 못한 쪽지의 발신인처럼 말이야.




3. 결국, 세계의 주인은 슬픔이 될 수 없기에


주인이의 장래 희망이 ‘사랑’인 것은 참 재밌는 메타포야. ‘사과’를 싫어하는 주인이. 그 색만큼이나 새빨간 거짓말 같은 위로와 사과를 받아 왔을 주인이가 선택한 것은 용서가 아닌 사랑이야. 자신을 상처 준 대상에게 마음을 쓰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기쁘게 해주는 세계에게 스스로 사랑이 되겠다는 선언. 얼마나 사랑스러워. 이 영화의 제목 <세계의 주인>이 <세계의 사랑>이 되는 순간이. 이 세계를, 삶을 지배하는 주인이 슬픔이 아니라 사랑이라고 말하게 되는 그 마지막 장면이.


유라의 카메라를 통해 관찰되는 주인이의 모습. “네가 잘 봐보라며.”라는 유라의 말은 우리가 어떤 태도를 가져야 하는지를 넌지시 건네주는 듯해. 윤가은 감독은 이 영화를 준비하며 “트라우마에 대한 반응은 어떤 자료를 찾아보아도 정형화된 모습은 없었다.”라고 말했다더라. 물론 위로는 어렵고, 도움은 더욱 어렵지. 그렇다고 우리가 서로에게 상냥하지 않아야 할 이유는 없어. 사랑이 가득한 세상에서 함께 노력하는 거지. “나는 네가 너무 어려워.”라는 말로 멀어질 수도 있겠지만, 그런 멀어짐조차 받아들이면서.



4. 후기


영화를 보는 동안에도, 보고 나서도 많이 울었어. 하지만 그건 슬픔이 아니었어. 주인이의 앞날에 다정함이 있을 것 같았거든. 물론 힘든 일도 있겠지만, 응원하는 마음으로 울었던 게 아닐까 해. 결국 난 많은 사람들이 이 영화를 봤으면 좋겠어. 감히 말하건대, 나에게 이 영화는 ‘내가 영화를 좋아하는 이유’가 될 정도의 작품이야. 그만큼 이 영화가 내 삶에 개입한 경험을 앞으로도 소중히 간직하고 싶어. 너도 그랬으면 좋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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